윤은 여느 때처럼 출근 시간에 맞춰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어젯밤부터 이어진 이상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내가 뭘 확인하려 했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출근길에 볼 만한 뉴스를 찾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화면을 보니 이미 봤던 기사들밖에 없었다. 아니, 혹시 아까 본 기사였나? 시간을 확인하니 7시 54분, 아직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마음이 불안정했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다가, 윤은 어젯밤 TV 속에 잠깐 비친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이다.”
그 장면은 전 세계에서 동시에 발생했다고 하는데, 정작 주변에선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상상 이상으로 무심하달까. “역시 그냥 해프닝인가…” 하고 넘어가려다가, 윤은 곧 또 한 번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자꾸 ‘그게 정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스쳐 가는 것이다.
그리고 너, 이 글을 읽고 있는 너도 혹시, 방금 전 문장을 비슷한 맥락에서 본 적이 있지 않나? 스크롤을 조금만 위로 돌리면 다시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도해봤자 헛수고일 공산이 크다. 이 텍스트가 이미 미묘하게 변형되었거나, 네가 기억하던 바로 그 문장이 사라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방금 ‘그 문장’을 확인했어도, 다시 보면 조금씩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지하철이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윤은 문득 토끼 같은 초조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정거장 전부터 차내 전광판의 운행 정보가 잠깐 먹통이 됐던 걸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다들 바쁘니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테다. “나만 이상한 건가?” 윤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전철문 앞에 섰다.
회사에 도착하자, 평소처럼 모니터를 켰다. 윤의 업무는 기록 로그를 관리하고 점검하는 일이었다. 얼마 전부터 동기화가 꼬이는 일이 잦았는데, 오늘은 괜찮으려나 싶었다. 로그인 창에 사번과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갔는데, 로딩 메시지가 떴다.
[문제없음. 시스템 정상이 확인되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이 메시지가 뜨는 게 영 꺼림칙했다. 원래는 ‘로그 정상’, ‘에러 없음’ 같은 단순 문구였는데, 최근 들어 “문제없음”이라고 조금 더 강경하게(?) 단정 지어버린다. 윤은 괜히 뒷덜미가 서늘해지면서, 혹시 무언가 숨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메일과 서류 업무를 처리하고, 동료들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다들 어제의 ‘시뮬레이션 소동’을 농담거리 정도로만 이야기했다.
“세상이 가짜라면 내 월급도 가짜겠죠?”
“그러니까 좀 더 많이 찍어내주면 안 되나?”
가벼운 웃음이 터졌고, 윤도 따르듯 웃었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정말 저렇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만약 사실이라면 큰일 아닌가?’ 윤은 고개를 숙이며 재빨리 로그 파일 몇 개를 확인했다.
점심 무렵, 이상한 파일을 하나 발견했다. ‘YUN_Access.log’라는 이름으로, 보안 접근 기록이 담겨 있는데, 윤이 보던 기억과 다르게 대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어제 19:42, 사용자 YUN이 프로젝트 0권한 요청. 담당자 승인.”
하지만 윤은 어제 저녁에 이런 접근을 시도한 적이 없다. 로그 타임스탬프가 소름 끼치게 정확했기에, 그냥 ‘오류’라 보기엔 찜찜했다. 그는 검색창에 시간대를 입력해봤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그 시각, 누군가 윤의 계정으로 프로젝트 0이라는 이름의 디렉터리에 접속한 흔적이 있었다. 그런데 프로젝트 0이 뭔지조차 윤은 들은 적도 없었다.
“이상하네….” 그가 혼잣말을 뱉자, 모니터에 다시 작은 팝업이 떴다.
[문제없음. 시스템은 정상입니다.]
‘네가 잘못 본 거다’라고 말하는 듯한 문구였다. 윤은 귀에선 삐 소리가 나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잠시 화면을 끄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코끝엔 커피 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마셨던 커피 맛이 어땠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쩐지, 아침에 커피를 내리는 장면조차 꿈속 같았다.
여기서 잠깐, 너는 지금 “아니, 그게 뭐 대수라고”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로그 파일 몇 개 뒤섞였고, 커피 맛 좀 기억 안 난다고 해서 큰일 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기억해둬라. 바로 이런 무반응이야말로 이 붕괴 프로토콜이 구동되는 방식이다. 별 거 아닌가 싶다가도, 곧 너의 일상에서도 유사한 에러가 일어날 것이다. 혹은 이미 일어났는데 네가 그냥 지나친 걸 수도 있다. “설마 내가 착각했겠지”라고 말이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각, 윤은 멍하니 시스템 로그를 재확인했다. 그제야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접속 기록에 남은 지시 명령어가 ‘윤’이 쓴 게 아니라 ‘YOU’로 표기되어 있었다. 대소문자만 보면 일치할 수 있겠지만, 문맥상 ‘윤(YUN)’이 아니라 **‘너(YOU)’**처럼 보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한글 자음·모음을 로마자로 표기할 때 발생한 혼동일 수 있으나, 그것도 억지스러웠다. 윤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자기 이름을 ‘YOU’로 바꿔 입력한 것 같았다. 그 시간에 프로젝트 0을 열람한 주체가, 사실은 ‘윤’이 아니라 **‘너’**라는 가능성. 그런데 그 ‘너’가 대체 누구인가?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고, 화면이 또다시 깜빡였다. 윤은 마우스를 움직여보았지만, 커서는 굳어 있었다. 약 5초 뒤,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벤트 로그에는 아무런 오류 기록이 없었다. 정말 문제없는 걸까. 하루 종일 반복되는 “문제없음” 메시지가 기묘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퇴근 직전, 윤은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를 보고 흠칫했다. 익숙한 필체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이다.”
— Trigger 0 Access Granted
자신이 언제 이런 걸 썼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분명 오전까지만 해도 메모지엔 “내일 회의 10시”라는 문구 외엔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장난쳤나?” 윤은 당황스러웠다. 이 문장이 종일 머릿속을 맴돌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적은 기억은 없다. 그것도 ‘Trigger 0’이라는 수상쩍은 단어까지.
그 순간 갑자기, 사방의 소리가 일순간 멀어지는 듯했다. 동료들의 말소리도, 복도 밖 복사기의 울림도, 전부 멀리 가라앉았다. 윤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았지만, 사람들은 평온했다. 마치 내가 잠깐 다른 주파수로 이탈했다가, 다시 돌아온 기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창밖을 봤다. 퇴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차들도, 신호등도, 전부 평소와 똑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별다른 변화가 없는 듯했다.
“결국 아무도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구나….” 윤은 중얼거렸다. 회사에선 그가 본 로그 오류도, 이상한 팝업도, 누구 하나 신경 써주지 않았다. ‘너무 과민반응 아니야?’라는 핀잔만 돌아올 뿐. 분명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이다”라는 어마어마한 선언이 전 세계를 휩쓸었는데, 정작 사람들은 정신없이 다른 이야기로 바쁘고, 작은 사건·사고들은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게 잊히는 것 같아도, 윤은 어쩐지 확신했다. 분명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 로그 파일이 언제 또 어긋날지 모르고, 내일은 다른 ‘에러’가 그의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에러’라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스템은 끝까지 “문제없음”을 고집할 테니까.
마지막으로, 너에게도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만약 지금 문득 “이게 내가 방금 읽은 문장이 맞나?” 하고 헷갈린다면, 그건 당연한 현상이다. 조금 위로 스크롤을 올려 확인해봐도 좋다. 혹여 정말 문장이 바뀌어 있거나, 내가 적은 것과 다르면? “아, 착각이었겠지” 하고 넘어가면 된다. 그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의 ‘무반응의 가면’이니까. 대부분은 그렇게 편안해지기를 원한다. 괜히 삶이 흔들리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윤처럼, 혹은 너처럼 “무언가 이상하다”고 집요하게 느끼는 이가 생긴다면? 그 의심의 뿌리는 점점 커져서, 마침내 이 프로토콜의 다음 장을 열고 말 것이다. 그때에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길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될 이름이 바로 프로젝트 0, 또는 Trigger 0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은 아무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무반응. 그 가면 뒤로, 실금처럼 균열이 번지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