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 메일을 받았다. 메일 내용에서 강사를 소개하는 문장이 눈에 띄었다.
‘한국 국적 최초의 OOO'
아마도 이 강사가 ‘한국 국적 최초’라는 문구를 사용한 이유는 어느 특정한 분야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자격증을 받았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메일을 읽으면서 마음에 걸렸던 문장은 ‘한국 국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일 경우 일반적으로 ‘한국’이라고 하지 ‘한국 국적’이라고는 적지 않는다. 이런 별난(?) 단어를 사용하게 된 배경은 같은 분야에서 오래전부터 ‘한국 최초'라고 하는 사람이 외국 시민권자여서 이분과 차별화하기 위함이라고 개인적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의 차별화를 위해 ‘최초’와 같은 단어를 사용할 때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만들어지는 부정적인 영향이 있다. 그 첫 번째 영향으로는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한국 국적 최초’와 같은 말에는 수평적이기보다 수직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 마치 운동경기에서 결승선을 통과한 순서대로 등수를 매기는 것처럼 ‘난 너희들보다 앞서 나가는 사람이야’라는 의도를 담고 있다.
‘한국 국적’이란 단어를 포기하고 ‘한국’이란 단어만 사용하는 순간 자신은 ‘일인자’가 아닌 ‘이인자’가 되기 때문에 이인자가 되지 않기 위해 ‘국적’이라는 말을 억지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일인자’가 되긴 했지만 다른 ‘일인자’와는 대결 구도를 낳게 되었다. 액션 영화에서 ‘같은 하늘에 일인자가 둘이 될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대결을 벌이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시 같은 자격증을 받았다고 하자. 그 사람이 이번에는 ‘서울 최초’와 같은 식으로 억지로라도 자신을 일인자로 만들지 않는 한 ‘한국에서 두 번째’이거나 ‘한국 국적으로 두 번째’가 된다. 어떤 경우이든 앞에 서 있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선택해 그 뒤에 서야 한다. 이렇게 되면 앞에 있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두 사람이 같은 편이 되고, 다른 편은 한 사람만 있게 되어 힘의 구도가 약간 기울어지게 된다. 이때 두 사람인 조직은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한 사람인 조직은 힘의 균형을 유지하거나 역전하기 위해 서로 더 많은 사람을 끌어오기 위해 경쟁하게 된다. 리더 사이에 이런 알력이 있게 되면 뒤따르는 사람들은 상당히 곤혹스럽게 된다. 축하를 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눈치를 보면서 ‘내가 왜 그 자격증을 받아서 이런 곤란한 일을 겪어야 하지?’와 같은 원망을 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런 경우는 조직에서 흔히 발생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공동대표’이다. 한 사람은 ‘한국 국적’이고 한 사람은 ‘한국’인 것처럼 앞에 나란히 서 있으면 세 번째 사람은 ‘내가 누구 뒤에 서야 안전할까?’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두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된다. 업무에 써야 할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눈치 보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업무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공동대표제도를 시행한 기업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편짜기의 부정적인 결과 때문이다.
‘최초’라는 단어가 주는 또 다른 부작용은 ‘심리적인 불평등’에서 오는 갈등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누군가 ‘최초’라는 말을 사용하면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두 번째, 세 번째와 같은 서열이 발생하게 된다. 서열은 수평적인 관계보다는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조직원 사이에 이런 서열 관계가 만들어지면 계급이 낮은 사람은 계급이 높은 사람의 명령에 따르는 수동적인 관계가 된다. 대표적인 조직이 군대조직이다. 이런 관계에서 부하는 ‘내가 이렇게 나서면 혹시 상사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능동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안전하고 편한 수동적인 행동을 선택하게 된다.
부장, 차장, 과장, 대리와 사원으로 구성된 조직에서 우열 관계가 성립한다. 대리가 부장에게 보고할 때 직급의 열위로 인해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 부장이 아무리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대하더라도 ‘부장’이라는 타이틀은 대리를 심리적으로 위축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만들어지는 이런 관계를 ‘심리적인 관계’라고 한다. 심리적인 관계에는 ‘심리적 우위’, ‘심리적 평등’과 ‘심리적 열위’ 세 가지가 있다.
리더십 교육을 받은 리더들이 공통으로 하는 하소연은 “교육에서는 잘 되었는데 막상 부서로 돌아와 실행해 보니 교육에서처럼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당연하다. ‘팀장 리더십’의 교육생은 팀장이다. 팀장끼리는 비슷한 직급이기 때문에 서열 관계가 비교적 수평적이다. 심리적으로 위축될 필요가 없는 관계이다. 그런데 부서에서는 어떨까?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는 것처럼 ‘심리적 우위’는 반드시 ‘심리적 열위’를 만들게 된다. 심리적인 우열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면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못한다. 엄격한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처럼 심리적인 위축이 조직에서 소통을 방해하는 원인이 된다. 리더십 교육에서는 같은 팀장끼리 ‘심리적인 평등’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지만, 부서에서는 심리적인 평등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기 때문에 교육에서만큼 효과가 없다. 따라서 리더는 부하와의 사이에 심리적인 평등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교육에서 습득한 리더십의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다.
두산 백과사전에서는 리더십을 ‘집단의 목표나 내부 구조의 유지를 위하여 성원(成員)이 자발적으로 집단 활동에 참여하여 이를 달성하도록 유도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 중 하나는 ‘자발적’이다. 심리적 평등 관계와 ‘자발적’이란 말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조직에서 리더는 자신이 원하는 방법대로 조직원들이 업무를 수행하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 리더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방법으로 부하에게 지시하게 된다. 상사로부터 자신이 모르는 내용에 대한 지시를 받으면 부하는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부하가 설사 상사의 지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해도 상사에게 쉽게 물어보지 못한다. 부하는 상사의 지시를 받고, 일단 알겠다고 대답은 하지만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상사의 지시를 나름대로 추측해 열심히 하지만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보고서가 상사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보고서를 만들어온 부하에게 상사는 화를 내는데, 이럴 때 상사의 꾸지람은 부하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어 상사와 부하 사이에 마음의 틈이 생기게 만드는데 이것이 갈등의 시작이다.
성과가 높은 조직은 조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조직은 조직원들 사이에 심리적인 수평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상사도 부하와 심리적인 수평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상사와 부하 사이에 수평 관계가 유지되면 부하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고, 상사의 지시에 대해서도 자신이 모르는 내용에 대해 스스럼없이 물어볼 수 있게 된다. 제대로 된 소통이 가능해진다. 부하로서 자신의 의견을 상사가 존중해 준다고 믿게 된다. 이럴 때 부하는 자신감이 높아지고 업무에 몰입할 수 있으며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최초’와 같은 단어는 자신도 모르게 부하에게 심리적인 위축을 가져오게 만드는 단어들이다. 조직의 성과를 높게 만들기 위해서는 ‘최초’와 같은 심리적인 우열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생각을 버리고 부하와 심리적인 평등 관계를 유지하면서 부하가 자발적으로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부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수시로 살펴보면서 심리적인 평등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어느 순간 최고의 상사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