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마음속에서

by 말 없는 나무

그렇게 나는 세 번째 병원에 취직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꼭 버티겠다는 다짐과 함께였다.

이곳에서 맡은 업무는 기능의학, 생리학 검사였다. 채혈도 가끔 했지만, 주된 일은 뇌파 검사였다.

면접 때부터 관심 있던 분야라 마음을 다잡고 “여기서는 잘해보자, 이번에는 1년은 꼭 버티자”라는 결심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30~40대 직원들이 많았고, 내 또래도 여럿 있었다.

한 달쯤 지나자 금세 친해졌고, 출근길이 즐거웠다. 제일 싫어하던 월요일 아침에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파트끼리 회식도 하고, 또래 직원끼리 노래방도 가며 즐겁게 지냈고, 오랜만에 마음이 편했다.


입사한 지 다섯 달쯤 되었을 때, 추석이 다가왔다.

남자친구와 차를 렌트해 시골집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완도까지 9시간 넘게 걸리기에, 명절마다 매번 새벽 시간대에 내려갔다.

새벽 네 시, 마을에 도착했지만 가족들을 깨우기 미안해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 이후 잠에서 깨며, 장거리 운전으로 피곤한 남자친구는 삼촌 댁에서 잠깐 쉬게 하고, 나는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집안일을 도왔다.


그날도 아빠는 어김없이 술을 드셨다.

그리고 술에 취해 "미친년아~ 뭣한디 오냐?꼬도 보기 싫다 서울로 올라가 버려라”라며 집안에 내가 있는데도 대문을 온 도구를 가져와 망치로 두드리며 꽉 잠가버리셨다.


아빠는 내가 대학교 졸업 한 이후부터 나한테 욕을 하기 시작했다. 미친년아 시발년아라고..

딸내미한테 이래도 되나 싶었고, 왜 이렇게 됐는지도 나도 의문이다. 이 때문에 나도 아빠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집 안에 갇힌 나는 답답하고, 서러웠다.

문을 열어달라 해도 아빠는 들어준 척도 안 했고, 마침 놀다가 들어오려는 동생에게 문 열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장비를 줘도 열지를 못했다. 결국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또 아빠가 문을 잠가버렸어 동생이 와서 해도 안 열어져 진짜 너무 화가 나서 서울로 가야겠어 서울에 있는 집에 제일 편한 것 같아 우리 그냥 올라가자" 남자 친구는 바로 집에 왔고 동생과 같이 망치를 이용해 문을 열었다.


그것 보고 있던 할머니는" 너희 아빠가 죽어도 오지 말어라 문딩이 저놈이 아빠냐? 아빠다운 행동을 해야지, 남이 보는 앞에서 저러면 쓰겠냐 오지 말어라 좋은 꼴 못봉께 알겠지"라며 화를 내셨고, 너무 화가 나 난 그 자리를 벅차고 차로 갔다.


오빠와 나는 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고, 난 이 상황이 너무 창피했다.

서로 언성이 높아질 때쯤 저 멀리 아빠가 터벅터벅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아빠는 우리가 있는지 없는지 차 안을 살폈고, 안네 있는 걸 확인하자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나는 모른 척 무시하고 그냥 이 상황을 벗어나자고 말했다. 그 순간 아빠는 옆에 통발 닻으로 쓰는 큰 회색 벽돌을 들어 차로 던지려 했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놀라 바로 내려 벽돌을 붙잡아 옆에다가 패대기쳤다.


미쳤네 미쳤어? 이거 정말 돌랐구먼, 이거 렌터카라고 내가 몇 번 말하디? 파 박살 나면 돈 물어내야 된다고 네가 줄 거야? 줄 거냐고 닌 아빠도 아니다, 완전 미친놈이네"라고 아빠한테 온갖 욕을 하며 어깨와 등을 때리며 집 가라고 소리쳤다.


아빠는 당연하다는 듯 “그 돈을 왜 내가 갚아야 하냐. 좋은 말 할 때 내리지 그랬냐”라고 말했다.


아빠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지만 싸움은 이어졌다.

서로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라며 소리만 높였고, 그 상황을 큰아빠가 보고 계셨다.


저녁 무렵, 나는 남자친구와 또 다른 이유로 심하게 다투었다.

감정이 겹쳐져 결국 “헤어지자”는 말까지 나왔고,

나는 화가 나서 “걸어서 서울 갈 거야”라며 가로등 빛 별로 없는 캄캄한 길을 울면서 걸어갔다


저 멀리서 남자 친구가 차를 끌고 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냥 지나갈 줄 알았다. 진짜 그럴 줄 알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고, 내 앞을 막으며 다시 들어가자는 남자 친구 말에 두세 번은 그냥 꺼지라고 필요 없다고 헤어졌는데 누구세요라며 거절했지만 몇 번 달래도 달래어 다시 큰아빠집으로 향했다, 결국 셋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큰아빠께서는 “연인끼리 싸우는 건 당연한 거야. 맞춰가면 돼”라며 나와 남자 친구를 달래주셨다

그러다 불쑥 이런 말하셨다.

“네가 술에 취한 아빠 마음도 이해해야 돼.”

나는 그 말이 너무 속상했다.

평생 술로 가족을 힘들게 한 사람을 왜 이해해야 하냐는 생각이 들었다.

믿었던 할머니도, 동생도 “이해해야 편하다는 그 아빠 술 마시고 저러는 거 하루 이틀이냐?고 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명절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왔다.

술에 취해 잠이 든 아빠한테는 인사를 못 하고, 할머니에게만 인사드리고 올라왔다.

명절은 여전히 내게 쉬는 날이 아니라 견뎌야 하는 날이었다.


서울에 돌아와 생각했다.

남자친구가 있을 때는 그래도 나를 감싸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없을 때는 여전히 예전처럼 힘들었다. 집안을 도와드려야 하는 마음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늘 흔들렸다.


요즘은 명절에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명절만 되면 내려가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용돈이라도 챙겨드려야 마음이 편하다.


명절이 끝난 뒤, 아빠에게서 전화가 자주 왔지만

술 마실 시간이라는 걸 알기에 받지 않았다.

일에 집중하려 했다.

출근하고, 일하고, 집에 와서 자는 하루가 반복됐다.

좋아하던 일에도, 취미에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 무렵, 좋아하던 그룹의 멤버가 세상을 떠났다.

그 일과 가족 문제, 직장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무기력했고, 불안했다

전 직장에서도 8개월 만에 그만뒀기에, 이번에도 8개월쯤 되면 떠나게 될 것 같았다.


결국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입사 9개월 차에 원장님은 내게 “다른 병원 알아보라”라고 하셨다.

이유는 단순했다. 실력이 늘지 않고, 지적받으면 주눅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고쳐야 할 건 기술보다 ‘마음가짐’이라는 걸.


하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다.

권고사직이 뭔지도, 실업급여가 뭔지도 몰랐다.

퇴근 후 직원들에게 털어놓자 다들 위로해 줬다.

그 덕분에 조금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불안은 또 남았다.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흔들리고, 나 자신도 흔들렸다. 결국 추운 1월, 병원을 그만두었다.


그래도 이번엔 조금 달랐다.

연락하며 지낼 수 있는 동료들이 생겼고,

그게 내게는 작은 위로가 되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