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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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배급날
박성진
칼럼니스트
현대 시조
〈배급날〉 — 가상의 북한 여성시인 ‘김숙향’ 作
1연
오늘도 배급받으러 붉은 표 들고 갔소
줄은 천 리 만 리요, 콩은 여섯 알이오
세 알은 조국 주고, 세 알은 나눠 먹소
2연
물도 없는 비누줄에 향수 냄새 피우며
화장도 없는 거울에 혁명표어 비치고
붉은 입술 그렸소, 선전용 여배우요
3연
감시병 눈빛마다 국가사랑 가득해요
웃으면 충성이고, 울면 불충이래요
나는 그저 하품했소, 대공수사받았죠
4연
장군님 그리워서 배가 자주 고파요
꿈속에서도 먹어요, 수령님 연설문을
글자 하나 씹을수록 더 배가 고파지죠
5연
이쯤 되면 웃겨요, 나도 슬며시 웃죠
웃다 보니 이 나라, 코미디가 되었죠
다들 진지하니까 더 슬픈 희극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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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시평:
〈웃음 뒤의 눈물, 허기 속의 자의식 — 북한 여성 시조의 풍자미학〉
이 작품은 “김숙향”이라는 가상의 이름을 통해,
북한 여성의 삶을 그 내부 시점에서 고발한 현대시조의 대표적 실험이다.
그 문체는 해학적이나, 그 내면의 톤은 철저히 비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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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 배급의 풍경
“세 알은 조국 주고, 세 알은 나눠 먹소”는
허기의 공유가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한 풍경이다.
여성은 배급이라는 말도 안 되는 구조를 시조의 형식미 안에 절묘하게 담았다.
한 알도 내 것이 없다는 절망 속에,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나눠야 한다는 그 황망함이 압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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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 꾸며진 얼굴
“화장도 없는 거울에 혁명표어 비치고”는
화장품이 아닌 ‘표어’를 비추며 존재를 꾸미는 이중적 삶을 보여준다.
“붉은 입술 그렸소, 선전용 여배우요”라는 구절은
북한 여성들이 대외 선전에서 이용되는 존재임을 풍자하는 동시에,
그 연출된 삶의 공허함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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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연: 감시와 처벌
“하품했소, 대공수사받았죠”는 단순히 웃기려는 장면이 아니라,
북한 사회의 감시 메커니즘의 과도함을 날카롭게 찌른다.
웃음과 눈물, 숨쉬기조차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현실이 그 한 줄에 담겨 있다.
해학 속에 숨은 자기 검열의 강박이 진실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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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연: 배고픔과 우상
“연설문을 먹는다”는 대목은 북한 정치언어의 허망함을
풍자한 압권이다.
읽어도 소화되지 않는, 되려 허기를 부추기는 그 언어는
여성에게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우상의 언어는 영양가가 없다는 문학적 패러디이자 정치적 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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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연: 웃음, 그러나 비극
“진지하니까 더 슬픈 희극”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이 시조 전체가 품고 있던 아이러니의 절정이다.
북한의 코미디는 웃겨서가 아니라 너무 진지해서 슬프고,
그 안에서 여성은 그저 침묵하며 웃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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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해학의 기술: 겉은 웃음이지만 속은 통곡이다.
풍자의 표적: 허기, 감시, 선전, 체제 이데올로기
여성의 위치: 연출된 얼굴, 침묵을 강요받는 존재
시조의 힘: 시조의
압축 속에 거짓 없는 진실이 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