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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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시아에서, 바람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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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여행작가의 서정 시 대서사시
《세인트루시아에서, 바람의 연대기》
1
피통산(Piton)의 이마 위로
햇살이 누웠다
시간은 잠든 거북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2
해풍은 연인의 손처럼
코코넛 잎을 흔들며
그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3
초록빛 물고기 떼
산호정원을 감싸 안고
바닷속 사랑을 조용히 말하고 있다
4
사탕수수밭 사이로
노을이 물들어 오면
어린 시절 향기까지 숨어 따라온다
5
흑인 어부의 노래는
파도보다 낮고 깊게
구름을 베고 흐느끼듯 섬을 감싼다
6
세인트루시아의 밤은
별을 숨기지 않는다
그대 눈동자마저 별처럼 반짝인다
7
목화 한 뿌리 피어난
바닷가 낡은 돌담에
식민의 시간이 옹기종기 내려앉는다
8
영국과 프랑스의 깃발
일곱 번 찢겨나가고
이제는 바람만이 국경을 넘는다
9
바나나꽃 진 붉은 날
검은 피부의 시인은
가난의 무게를 노래로 재어 올린다
10
루시아는 섬이 아니다
여인은 대지였다
숨 쉬는 듯 살아 있는 노래였다
11
그대와 손 맞잡은 채
돌길을 걷고 있으면
시간도 발자국 되어 함께 노래한다
12
세인트루시아의 아침은
바람이 먼저 깨어나
시처럼 세상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심층 평론 – 《노래하는 섬, 살 속의 기억》
1. 시조의 장르적 확장, 대서사적 서정
박성진 시인은 이 작품에서 현대시조의 정형미를 유지하면서도, 대서사시적 형식을 빌려 섬의 역사와 문화, 생태, 사랑, 그리고 인간성까지 폭넓게 담아냈다. 특히 12연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단순한 여행기나 풍경시를 넘어, 한 섬의 영혼을 탐사하는 서정적 서사시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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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인트루시아, 인간과 자연의 결절점
이 작품은 단순한 이국적 묘사에 머물지 않는다. 시인은 자연을 응시하되, 그것을 인간의 감각과 역사, 기억과 애도 속에 끌어들인다.
1연~3연에서 등장하는 피통산, 코코넛, 산호정원 등은 이국적 이미지를 넘어
➤ 자연과 사랑, 휴식의 공명체로 읽힌다.
4연~6연은 향수와 낭만의 지층이다. “노을이 숨어 따라오고”,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인다”는 표현은
➤ 시간의 감성적 회귀를 상징한다.
7연~9연에 이르러 시는 역사와 정치의 지층으로 깊어진다.
“식민의 시간”, “찢겨나간 깃발”, “노래로 재는 가난”은 시적 서사에 비판적 윤리의식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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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래의 시학 – 루시아는 노래였다
시인은 세인트루시아를 “섬”이 아닌 “여인”, 그리고 **“살아 있는 노래”**로 비유한다. 이는 단순한 의인화를 넘어
➤ 시 전체를 노래의 형식과 리듬으로 엮어낸 시적 장치다.
10연 “루시아는 섬이 아니다 / 여인은 대지였다 / 숨 쉬는 듯 살아 있는 노래였다”는
➤ 섬의 존재론을 노래적 존재론으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대목이다.
이러한 기법은 서정의 미학이 정치와 자연, 시간의 교차점에서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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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형식미와 리듬의 절제
12연의 긴 호흡임에도 시조 특유의 3장 구성은 유지되며,
각 연마다 압축된 정서, 시적 전환, 여백의 여운이 살아 있다.
형식은 정제되어 있으되, 감정은 풍성하며, 리듬은 노래하듯 물 흐르듯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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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론 – 한 섬을 넘어선 인류 서정의 지도
《세인트루시아에서, 바람의 연대기》는 단순한 섬 여행기의 시가 아니다.
이 시는 하나의 섬을 중심에 두고 펼쳐지는 인간, 자연, 역사, 사랑의 입체적 지도이며,
박성진 시인은 이를 통해 현대시조의 가능성과 세계 서정의 확장성을 품격 있게 증명해 낸다.
“세인트루시아는 섬이 아니라, 살아 있는 노래였다”
이 한 줄은 오늘의 독자에게 가장 오래 남을 것이다.
박성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