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나는 왜 나를 들여다보는가"

박성진 칼럼니스트

by 박성진

박성진 시인의 윤동주 사랑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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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80주기 특집


제5편. 자화상과 윤동주 — “나는 왜 나를 들여다보는가”


박성진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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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작하며


윤동주의 등단작 「자화상」(1940)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내면 탐색의 시학을 보여준다.

이 시는 단지 한 청년의 자기 성찰이 아니라, 한 민족의 자아 인식이 시라는 형태로 응고된 순간이다.

윤동주는 묻는다. “나는 왜 이토록 나를 바라보는가?”

그의 시는 타자를 보지 않고, 세계를 보지 않고, 오직 자신을 본다.

하지만 그 ‘자기’는 결코 개인의 우울이 아니라, 시대 전체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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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거울 속에 나는 무엇을 보는가” — 심연의 고백


「자화상」은 “산골 물가에서 / 바위를 깎아 / 나를 만들고”로 시작된다.

여기서 ‘바위’는 견고한 자아가 아니라, 차갑고 무표정한 시대의 표면이다.

윤동주는 그 바위 위에 스스로를 새긴다.

그것은 **‘시인의 자서전’이 아니라 ‘시대의 묘비’**이다.


그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부끄러움을 아는 눈물”로 자신을 마주한다.

그 눈물은 연약함이 아니라, 윤리적 각성의 징후다.

자기를 보는 눈은 결코 순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통과한 고통의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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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외면 아닌 내면 — 저항으로서의 침묵


윤동주의 자화상은 침묵의 형식을 택한다.

그는 아무것도 외치지 않고, 단지 자신을 응시한다.

그러나 그 응시는 타협 없는 직면이며, 회피 없는 고백이다.

그의 ‘내면’은 도피의 공간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저항이 부딪히는 실존의 격전지다.


윤동주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겠다.

그 대신 나는 내 안을 파헤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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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우물 안의 별”


윤동주에게 ‘우물’은 갇힌 공간이 아니라, 깊이의 은유이다.

그는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본다.

바로 그 하늘에서 별을 세고,

자기를 씻는다.


우물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는

바깥세상보다 더 깊은 윤리의 광맥을 본다.

자화상 속 윤동주는 외면한 것이 아니라,

너무 깊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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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마치며 — 자기를 응시한다는 용기


윤동주의 「자화상」은 시대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는 방식이 아닌,

스스로를 응시함으로써 시대를 넘는 방식이다.

그는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부끄러움과 싸웠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윤동주가 남긴 가장 강한 문학적 저항이었다.


8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도 자문할 때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자화상을 얼마나 직시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부끄러움이라는 언어를 기억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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