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그해 봄, 위벽에 핀 그림자

박성진 칼럼니스트

by 박성진

뉴욕행 비행기 탑승전 위 내시경 예약증을 받았다



〈그해 봄, 위벽에 핀 그림자〉


시: 박성진


해설: 박성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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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

나는 뉴욕행 비행기 티켓보다

위 내시경 예약증을 먼저 받았다.


> 해설

인생의 전환점에 선 화자.

미래로 나아가기 전, 병원이라는 현실의 문턱에 걸린다.

유학보다 내시경이 먼저인 삶. 계획보다 진단이 앞선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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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는 모든 걸 삼켰고

나는 남은 꿈을 삼키려

만학의 이름으로 떠나려 했다


> 해설

시대 배경: IMF 외환 위기.

사회가 흔들리던 시절, 개인은 늦깎이 유학생으로

무너진 현실에서 다시 일어서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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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나를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병원이 나를 먼저 불렀다.


> 해설

희망보다 먼저 찾아온 현실.

계획은 미래로, 진단은 현재로 데려온다.

이 문장은 인생의 잔혹한 역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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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짜게 먹고, 늘 속이 쓰렸고

그건 내 탓이라 여겼다

살다 보면

뭐 하나쯤은 견디는 거라며.


> 해설

많은 이들이 건강 이상을 무시하거나 사소화한다.

스스로를 탓하며 병을 생활화하는 슬픈 현실.

하지만 직감은 이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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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내시경은 거부했다

젊다는 이유로,

내 상처는 깨어있어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끝까지 눈을 감지 않기로.


> 해설

이 부분에서 시인은 스스로 선택한다.

수면 상태의 편안함 대신

고통을 마주하는 깨어있는 결단.

인간은 두려움 속에서도 의식을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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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에게 말해두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하면

조직검사까지,

그게 내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 해설

이 말은 사실상의 유서다.

의심을 인정한 사람만이

그 의심을 현실로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방어선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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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카메라가

위벽 어딘가에 멈췄을 때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읽었고


> 해설

내시경실의 정적, 멈춘 화면, 멈춘 시선.

말없이 교환되는 직감의 언어.

그 순간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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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조금 떼어보죠"라 했다

나는 말 대신 손으로

OK, 그 작은 사인을 보냈다


> 해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크지 않다.

때론 손가락 하나로, 눈빛 하나로

운명을 맞이한다.

‘작은 싸인’은 가장 큰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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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종이 한 장에 인쇄된 단어가

내 삶을 삼켰다


“위암입니다.”


> 해설

진단은 조용히, 그러나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그 말은 총소리도 아니고,

폭탄도 아니지만

인간의 세계를 한순간에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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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날도

하늘은 평소처럼 높았고

길 위엔 아이들이 뛰놀았고

지하철은 시간을 밀고 나아갔고

나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 해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나만 변했다.

병이 나를 가르고,

세상은 계속 평온하다.

그것이 가장 잔인하고 가장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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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마주했고

죽음을 통과해 살아남았다


> 해설

위암 진단은 죽음의 문턱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통과했다.

이 구절은 승리의 외침이 아닌,

침묵 속의 생존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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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그날을 '그림자 생일'이라 부른다

죽음이 태어난 자리에

삶이 다시 뿌리를 내린 날


> 해설

이 시의 백미.

죽음을 새로 태어난 날로 이름 붙이는 작가의 감각.

삶이 얼마나 끈질기고 존엄한 지를 말하는 결정적 구절.

그림자 생일, 이 낱말은 생과 사를 통째로 감싸는

시적 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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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

나는 위암 진단을 받았고

지금, 살아 있다.


> 해설

첫 연과 마지막 연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봄, 시작, 진단, 생존.

이 시는 ‘죽음을 말하면서 삶을 전하는 시’다.

그래서 아름답고, 그래서 쓰라리며, 그래서 희망적이다.



이 시는

내시경실의 냉기와 손끝의 싸인, 진단서를 받아 든 날의 공기,

그리고

지금 살아 숨 쉬는 감각까지

한 편의 서사로 엮은 리얼리즘 고백 시입니다.


그 어떤 장르보다 진실하고,

그 어떤 문장보다 조용히 강하게

살아 있는 지금을 말해줍니다.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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