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젊은날의 위암

박성진 칼럼니스트

by 박성진

위암입니다



박성진


그날, 나는 단 한 줄로 내 삶의 절반을 접었다.

“위암입니다.”

의사의 짧은 문장이 내 심장에 박혔다.

그 이후 나는 살고 있지만,

그날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다.


글을 쓴다는 건,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행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글을 쓴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내가 죽음을 통과해 왔다는 자필 증명서다.


나는 위암 진단을 받았다.

마침표를 찍는 일이 아니라

삶의 문장 하나가 쉼표에 걸린 일이었다.


병원 침대 위에서 ‘다시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무엇을 쓰고 남길 것인가’라는

더 절박한 질문으로 바뀌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글을 쓴다는 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엄숙한 방식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자신을 데려다줄 다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죽음을 통과한 자의 글쓰기는

아름다운 표현을 위해 쓰지 않는다.

살기 위해 쓴다. 한 문장이,

한 단어가, 심장에 피를 돌리고,

의미를 공급하고, 버티게 한다.


나는 그 시절,

아주 단단한 침묵 속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여기까지 살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다.

내 속에 남아 있던 말들,

침묵 속에서도 부르던 이름들,

그리운 날과 두려운 날이 섞인 기억들.


그것들이 모여

글이 되고, 시가 되고, 내가 되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죽음을 통과하면 말이 사라진다”라고.

그러나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죽음을 지나야 비로소 진짜 말이 시작된다.


그 말은

남을 위한 것도, 상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건 온전히

‘살아남은 내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고백’이다.


나는 내가 쓴 시가

누군가의 새벽이 되었으면 했다.

검진을 기다리는 복도에서,

진단 결과 앞에서 멍해진 오후에,

‘살고 싶다’는 말조차 삼키고 앉아 있는 그 누군가에게

아주 조용히 말을 걸 수 있기를 바랐다.


지금 나는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한 편의 시는 생존자에게 ‘호흡’이고,

누군가에겐 ‘숨통’ 일 수 있다는 것을.


글을 쓴다는 건 삶과 죽음 사이,

딱 한 장의 종이를 천천히 펴는 일이다.

그 종이 위에 나는 살아 있다는 서명을

매일 새긴다.


죽음 이후의 날들을 기억하는 시인

숨결의 언어를 쓰는 생존자


이제, 글은 삶의 일부가 되었고,

또 누군가의 삶에 닿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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