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침묵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by 박성진

존재의 침묵



〈존재의 침묵〉


박성진 시인


말이 오기 전

먼저 도래한 것이 있었다

바람도 아니고

빛도 아니며

침묵이었다


그 침묵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거기서 모든 물음이 시작됨을 들었다


존재는

소리로 오지 않았다

소리를 기다리는

돌의 등뼈로,

어둠 속 수직의 정적(靜寂)으로 왔다


나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 앞에

무릎 꿇었다

그것이 들판이든

밤하늘이든

그대의 눈동자이든


그리고 깨달았다

모든 말은

침묵을 배반하거나,

침묵을 옹호하거나,

침묵에 복귀하려는 싸움이었다는 것을


그러니 나는 오늘도

말보다 먼저

고요히 묻는다

내가 아닌 것이 나에게 묻는

그 고요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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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및 철학적 평론


― 『하이데거와 시: 존재의 언어 이전, 침묵 이후』


이 시는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 개념인 **‘존재는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를 전제로 하되, 그 언어가 발화되기 전의 상태, 즉 존재의 근원적 침묵에 주목합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존재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정의하면서, 이 물음은 본래적 침묵 속에서 태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시는 바로 이 침묵의 도래를 언어화합니다.


1연과 2연은 존재론적 시작의 순간, 즉 ‘말이 오기 전’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침묵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언어 이전의 존재 방식입니다.


“나는 거기서 모든 물음이 시작됨을 들었다”는 구절은,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청취자(der Hörer)”**로서의 시인의 자세를 반영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인은 깨달음에 이릅니다.


> “모든 말은 침묵을 배반하거나 / 침묵을 옹호하거나 / 침묵에 복귀하려는 싸움이었다”




이는 언어가 단지 말이 아니라, 항상 침묵의 지평 위에 떠 있는 임시 구조물임을 인식하는 하이데거적 통찰입니다. 시는 결국 다시 침묵의 복귀로 마무리되며, 이는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 특히 **‘시인은 존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횔덜린론』의 사유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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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의 한 문장


하이데거에게 침묵은 말 이전의 존재이며, 박성진의 시는 그 침묵의 울림을 언어 이전의 언어로 꺼내는 철학적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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