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초토의 시 제1편
구상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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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토의 시 제1편》
> 흐르는 것이 피뿐이랴
불타는 것이 집뿐이랴
무너진 것이 성뿐이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정신이 짓밟히는
이 땅의 비극을 나는 본다
나는 보았다
피가 강을 이루고
살이 들을 이루고
뼈가 산을 이루는
이 땅의 서글픈 풍경을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나는 가슴속에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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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언어 — 구상 〈초토의 시〉의 실존적 윤리와 종교적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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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는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 곧 6·25 전쟁의 처참한 실상을 정직하게 마주한 시로 꼽힌다. 그러나 이 시의 힘은 단순한 전쟁 서술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그 잿더미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고, 신 앞에 무릎 꿇는 고백의 형식을 택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깊이를 획득한다.
시의 서두 “흐르는 것이 피뿐이랴 / 불타는 것이 집뿐이랴”는 반복적 대구 형식으로 전쟁의 전면적 파괴를 환기한다. 물리적 파괴(성, 땅)와 정신적 붕괴(정신이 짓밟힘)가 병치됨으로써, 이 시는 단순한 풍경 묘사에서 철학적 실존 인식으로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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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부분의 “피가 강을 이루고 / 살이 들을 이루고 / 뼈가 산을 이루는” 구절은 전쟁의 참상을 초현실적 스케일로 확장하며, 시인의 고통을 온몸으로 체화한 목격자의 언어로 승화된다. 이는 전쟁의 현장에서 시인의 시선이 곧 윤리적 증언이 되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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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3행에서 시인은 고통을 기도로 바꾼다.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고는 / 견딜 수 없는 슬픔”은 단지 개인의 신앙고백을 넘어, 시인이 감당한 시대의 절망을 윤리적 언어로 환원한 것이다. 구상은 이 시를 통해 “시란 무엇을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그 해답을 기도하는 시, 고통을 품은 사랑의 언어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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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의 시는 무너진 폐허 위에서 기도를 드리는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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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은 절망을 노래하지 않았다. 그는 절망 너머에 있는 믿음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초토의 시》는 파괴된 세계에서 탄생한 윤리적 고백이며, 시인이 언어로 기도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의 언어는 붕괴 속의 침묵이 아니라, 무릎 꿇은 자의 가장 숭고한 외침이었다.
전후 한국문학의 윤리적·종교적 정수를 온전히 품은 이 시는, 폐허를 넘는 기도의 문학, 시로 드리는 시대의 예배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