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 "향수"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by 박성진

정지용 "향수"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정지용 시 〈향수〉 전문


넓은 들에

밤바람 소리 말같이 들리고


낮에도 벌레 우는 고요한 그곳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지금도 그곳에 가면

물소리, 바람 소리, 뻐꾸기 소리

가슴에 스며와 눈물이 나리니


노란 저녁 하늘 끝

초가지붕 너머 저녁종 소리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들길 따라 걸어가며

발끝에 밟히던 풀잎 냄새

그것이 문득문득 살아나니


누이야

내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이룬 골짜기


그 속에서 나는 놀던 때를 생각한다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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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평론가의 문학평론


—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의 내면과 민족적 무의식”


1. 서문: ‘향수’라는 시의 영혼


정지용의 〈향수〉는 단순한 고향의 추억을 넘어서 잃어버린 시간, 되돌릴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절절한 갈망을 담은 한국 현대시의 백미다.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는 후렴은 개인의 정체성과 민족의 상실감을 동시에 환기시키며, 20세기 한국인의 ‘내면화된 고향’을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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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별 해설


● 1연


넓은 들에

밤바람 소리 말같이 들리고


> 이 도입부는 청각적 이미지로 시작된다. 밤바람 소리를 말이 달리는 듯 묘사함으로써, 기억 속 고향의 생동감과 환상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마치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선 첫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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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연


낮에도 벌레 우는 고요한 그곳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낮에도 고요한 장소, 즉 자연의 순수성과 평화가 담긴 이상향이다. “차마 꿈엔들…”이라는 절창은 기억을 지워낼 수 없다는 절절한 고백이다. ‘차마’라는 부사는 정지용 특유의 절제된 정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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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연


지금도 그곳에 가면

물소리, 바람 소리, 뻐꾸기 소리

가슴에 스며와 눈물이 나리니


> 이 연은 고향의 청각적 정경이 시적 자아의 정서를 건드리는 순간을 묘사한다. **‘가슴에 스며와 눈물이 난다’**는 구절은, 자연이 곧 기억의 트리거이며, 감정이 기억과 함께 작동하는 구조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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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연


노란 저녁 하늘 끝

초가지붕 너머 저녁종 소리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시각적 심상(저녁노을)과 청각적 심상(종소리)의 교차로 고향의 정서와 시간성을 환기한다. **'초가지붕'**이라는 단어에서 소박한 농촌 공동체의 따뜻함이, **'저녁종 소리'**에서는 하루를 마감하는 정적의 리듬이 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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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연


들길 따라 걸어가며

발끝에 밟히던 풀잎 냄새

그것이 문득문득 살아나니


> 촉각과 후각의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추억은 단지 머리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감각을 통해 되살아난다. 정지용의 감각적 서정성이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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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연


누이야

내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누이야’**라는 호명이 등장하면서 정지용 시에서 드물게 구체적 인물과 정서의 방향성이 드러난다. 고향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관계와 정서적 유대까지 포함된 복합적 세계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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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연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이룬 골짜기


> 이 연은 〈향수〉의 색채적 정점이다. 화려한 꽃의 이름들을 나열하며 고향의 풍요와 이상화를 그린다. **‘꽃 대궐’**이라는 표현은 시적 자아가 기억 속 고향을 현실 이상의 환상적 공간으로 승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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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연


그 속에서 나는 놀던 때를 생각한다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회상은 결국 ‘놂’의 시간, 유년기의 자율과 자유로 귀결된다. 여기서 고향은 단지 장소가 아닌 시간의 총체적 은유다. 마지막 후렴은 모든 기억과 정서를 아우르며 전체 시의 리듬을 감성적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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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향수〉는 단지 정지용 개인의 고향 회상 시가 아니라, 이산과 단절의 민족적 체험이 응축된 대서사적 서정시다. 유년의 무구한 자연, 상실된 정서의 복원 욕망, 그리고 끝내 돌아갈 수 없는 ‘그곳’에 대한 절절한 노래는 오늘날까지도 한국인의 정체성과 감성적 기반을 울리는 거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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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의 말


“〈향수〉는 언어의 꽃과 감각의 뿌리로 엮은 고향의 교향곡이다. 차마 잊지 못하는 세계는, 우리 모두의 영혼 속에 흐르는 민족의 고요한 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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