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한계령을 위한 연가
● 시 원문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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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평론: 고립과 욕망, 그리고 언어의 세련
1. 고립의 욕망: 폭설과 낭만적 선택
시인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라고 시작하며, 일상적 풍경이 아닌 극단의 상황을 연출합니다. 여기서 폭설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닌, 고립과 단절의 은유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를 공포로부터의 구원 대신 낭만으로 재해석하며, 스스로 운명에 묶이는 길을 택합니다.
한계령의 고립은 주체적 선택의 결과입니다. 외부 세계가 진정으로 제공하는 구조적 풍요와 이동의 자유를 거부하고, 눈부신 고립이라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 내면의 공동체—사랑하는 ‘그 사람’—와의 밀도를 선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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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원 거절의 의지와 상징성
후반부에서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라는 구절은 강렬한 상징입니다. 헬리콥터는 구원과 파괴,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닌 존재로 나타납니다. 과거엔 “젊은 심장에 포탄을 뿌리던” 폭력의 수단이었고, 단절 상황에서조차 그 구조적 시스템의 손길을 거부하는 화자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시적 자아는 단지 도피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개입 자체를 내면의 몰입과 사랑의 순도 앞에서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시는 현실 구조와의 단절이 곧 개인의 정서적 자율성 회복이라는 선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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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색채의 대비와 시적 긴장
흰 눈: 정지, 순수, 동화 같은 환상세계(“동화의 나라”)
까만 포탄: 폭력과 역사적 트라우마
포탄 대신 뿌리는 먹이: 구조의 위선, 구원 가장함
이 대비들은 시 전체에 긴장과 반전의 리듬을 부여합니다. 시인은 아름다워 보이는 풍경 속에서조차 내면에 감춰진 폭력과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며, 표면의 동화성을 깨끗이 거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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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랑과 고립: 언어로 쓴 운명 서정
시인은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로 마무리합니다.
이 ‘묶임’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고립에 대한 자발적 응답으로서의 사랑 서정입니다.
고립은 공포가 아니라, 발이 아닌 ‘운명’이 묶이는 축복이며, 사랑은 짧지만 압축된 내밀한 운명의 순간으로 표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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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합: 문정희의 고립 서정과 정제된 언어의 위력
이 시는 자연 풍경 속에서 고립된 낭만을 선택하는 여성 주체의 욕망을 치밀하게 그립니다.
구조적 현실과 구원의 시스템조차 내면의 정서적 자율성 앞에서 거부됩니다.
역설적 언어(폭설 = 고립, 풍요 = 공포, 구원 = 거절)는 시의 무게를 배가시키며, 순수문학으로서의 서정성을 강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