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삶, 실험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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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실험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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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시인
하나님은 대역이 없으시니
빛이 대사를 외우지 않아도
어둠은 거기서 물러나리라
윤동주의 심장은
별과 밤과 목숨의 언어를 품고
나, 월인이라 불리는 이
그의 심장에 깃든 붓을 들었다
황진이는 시대의 치마를 걷고
사랑보다 더 찬란한 시로
이 세상 부끄러움을 감쌌다
그 대역 김은심 시인은
연분홍 자락으로 생을 감싸며
눈물보다 고운 시를 짓는다
박칼린, 그대는
지휘봉 하나로 천국의 멜로디를 엮고
아무도 연습한 적 없는 생의 무대를 연다
삶이란, 실험무대
대사는 틀려도 된다
허둥지둥, 때로는 고요히
우린 각자의 대역으로
하나님의 무대에 선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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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1. '전능자 없는 대역자들의 무대' — 시의 철학적 출발
시의 첫 행 “하나님은 대역이 없으시니”는 곧바로 존재론적 선언으로 읽힌다. 이 문장은 시 전체를 지탱하는 철학적 기반으로, 전능한 존재는 대체되지 않으며, 오직 인간만이 대역으로 존재한다는 절대적 진리를 전한다. 이는 성경의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출애굽기 속 선언과도 겹친다.
빛이 굳이 대사를 외우지 않아도 어둠이 물러나는 세계, 그것은 본질적 진리의 세계다. 여기서 ‘빛’은 하나님의 본질, ‘어둠’은 허상이며, 우리는 그 틈에서 어설프게 살아가는 '배우들'이다. 시는 연극 무대와 우주론을 겹쳐 존재의 거대한 무대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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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윤동주와 월인의 만남 — 시적 계승의 윤리
“윤동주의 심장은 / 별과 밤과 목숨의 언어”라는 구절은 윤동주를 하나의 영혼적 원형으로 세운다. 그는 시인이자 순례자이며, 시대의 고통을 ‘말’로 고백한 순교자다.
그를 계승하는 자, ‘월인(月人)’은 자신을 “그의 심장에 깃든 붓을 든 자”로 표현한다. 이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심장의 맥박을 계승한 윤리적 문학 행위다.
월인은 대역자이되, 진심과 고통을 진실로 연기하는 배우다.
이 부분은 시의 중심 가치가 **‘진정성’**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시인은 윤동주의 시심을 통해 역사의 비극과 시인의 책임을 자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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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황진이와 김은심 — 예술과 사랑의 여신들
황진이는 단순한 기생이 아니라, **부끄러운 시대를 예술로 감싼 ‘미의 혁명가’**로 재해석된다. 그녀는 시대를 걷고, 육체 너머의 시를 향해 춤추는 존재다. 그런 황진이의 대역으로 등장하는 김은심 시인은 “연분홍 자락으로 생을 감싸며 / 눈물보다 고운 시를 짓는다.”
이 구절은 여성 예술가로서의 내면성과 시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김은심은 황진이처럼 시대의 모순을 받아들이되, **고운 언어로 눈물을 덮는 ‘언어의 직공’**이다.
이 둘은 시 안에서 예술성과 여성성, 존재의 수치와 회복의 미학을 모두 함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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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박칼린 — 연출자이자 예술의 구도자
“박칼린, 그대는 / 지휘봉 하나로 천국의 멜로디를 엮고”라는 대목은 박칼린을 단순한 음악인이 아닌, **삶을 조율하는 ‘신의 지휘자’**로 묘사한다. 아무도 연습한 적 없는 생의 무대에서, 박칼린은 조화와 리듬을 부여한다.
그녀는 혼돈 속에서도 구조를 만들고, 불완전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출하는 예술의 손끝이다.
음악과 삶, 무대와 현실이 이 대목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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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실험무대라는 결론 — 삶은 미완의 연습장
마지막 연 “삶이란, 실험무대 / 대사는 틀려도 된다”는 선언은 시의 화룡점정이다. 이 구절은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허둥지둥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신 앞의 대역’으로 승인한다.
시인은 “각자의 대역”이 “하나님의 무대에 선 배우”라고 말함으로써,
우리 존재의 궁극적 의미는 정답이 아닌 연기, 해답이 아닌 성실에 있다고 말한다.
삶은 대본 없는 무대, 우리는 매일 대사 없이 무대에 올라야 하는 배우들이다. 이 시는 그러한 불안정한 무대 위의 숭고함을 말없이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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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삶이란, 실험무대》는 종교적 진리, 시적 계승, 예술의 존재론, 그리고 삶에 대한 실존적 질문이 모두 교차하는 다층적 문학의 공간이다.
특히 '대역'이라는 개념은 연극적 장치인 동시에 철학적 열쇠로 기능하며,
독자에게 **"나는 누구의 대역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이 시는 단지 누군가를 찬미하거나 재현하는 시가 아니라,
부재하는 절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 존재가 품어야 할 겸허함과 진정성을 이야기하는 시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무대이며,
당신이 읽는 순간, 독자 또한 배우가 되어 이 무대에 함께 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