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 -신비로운 곳에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by 박성진

빙하 -신비로운 곳에



시 원문


〈빙하, 신비로운 곳에〉


박성진 시인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있었다

그 위로 그림자조차 숨을 죽였다


물의 기억이

천천히 얼어

빛의 결로 남았다


그 아래

잠든 날개 하나

천 년의 바람이 지나갔다


나는 말을 삼켰다

입을 열면

깨질 것 같은 세계였으므로


끝내 아무도 몰랐다

거기, 내가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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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신비로운 곳에〉 — 침묵과 결의 시학


문학평론가


박성진 시인의 시 〈빙하, 신비로운 곳에〉는 언어의 소멸에서 시작되는 존재의 시학이다. 이 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 말을 멈춤으로써 오히려 드러나는 시의 고요한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시의 첫 연,


>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있었다 / 그 위로 그림자조차 숨을 죽였다”

에서 우리는 이미 물성 이전의 공간, 영혼의 시간대에 진입한다.

여기서 ‘눈’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기억을 덮은 백색의 커튼이며,

‘그림자’조차 숨죽이는 정적은 존재의 가장 순정한 상태를 보여준다.




2연과 3연에서 등장하는 “물의 기억”, “빛의 결”, “잠든 날개”, “천 년의 바람” 등은

모두 시간과 생명의 상징물이다.

특히 “빛의 결”은 자연과 시의 접촉면을 상상하게 하는 아름다운 은유로,

말이 닿을 수 없는 세계를 시가 어떻게 감지하고 기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내면의 응답이기도 하다.


이 시의 정점은,


> “나는 말을 삼켰다 / 입을 열면 / 깨질 것 같은 세계였으므로”

에서 도달한다.

여기서 시인은 말을 삼키는 것이 폭력의 중단이자 시의 절정임을 드러낸다.

언어는 더 이상 진실을 옮기는 수단이 아니며,

그 자체로 세계를 훼손할 수 있다는 통렬한 자각이 이 시를 지탱한다.




마지막 연은,


> “끝내 아무도 몰랐다 / 거기, 내가 있었다는 것을”

이라는 절제된 서술을 통해

존재의 투명한 흔적, 침묵 속에서 발현되는 윤리적 자기 소거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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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빙하, 신비로운 곳에〉는

형식과 내용, 시정과 윤리, 존재와 소멸이

완벽한 조율로 공존하는 고요한 시편이다.

박성진 시인의 시는 말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의 시는 점점 침묵의 가장자리로 이동하며,

거기에서 존재의 본질과 조우한다.

이 작품은 시인의 자취를 지우려는 가장 시적인 방법이

곧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시 그 자체에 대한

가장 깊은 애도이자 존경임을 말없이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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