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라벤더의 향기-병실 앞에서 》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

by 박성진

떠나가는 그녀에게 건네는 라벤더 화분



시 원문


《보랏빛 라벤더의 향기 — 어느 병실 앞에서》


시인 박성진


보랏빛 라벤더의 향기 맡으며

나는 문을 열었다

강남역 G아르체 갤러리,

불과 석 달 전

빛과 그림자 사이로

그녀가 있었다


삶을 잃지 않으려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

독한 항암제 투여로 마른 어깨

그러나

한 송이 꽃처럼

단단하게

아름답게

버티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시인님 펜이 됐어요

기도해 주세요”


그 순간,

내 심장이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말보다 먼저,

나는 펜을 들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믿음의 자매,

몇 번을 더 병실을 찾았는지

잊었고

기도 중에 향기로 스며든

라벤더 화분 하나

그녀의 손에

내 마음을 건넸다


그녀의 딸이

조용히 바라보았고

아들은

끝내 눈을 들지 못했다


나는 침묵 속에서

한 줄의 시로만 말할 수 있었다

“당신은 여전히

보랏빛으로 피고 계십니다”


그녀는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나는

한 송이 라벤더가

바람 없이도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별을 해야만 했다


꽃은 말이 없고

말은 꽃이 되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향기 하나를 남겼다


그리하여

보랏빛 화분 하나

그녀의 창가에 놓이고

나는

기도처럼 돌아섰다


시간은 흐르지만

향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시인도, 펜도, 기도도

남아 있다

그녀를 향해

라벤더의 향기처럼

매일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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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칼럼니스트의 평론*****


“죽음 앞에서 시는 꽃이 되었다 — 박성진의 라벤더 미학”


1. 병실이라는 시의 무대


박성진의 이 시는 삶의 극점, 곧 죽음을 앞둔 인간의 얼굴 앞에서 시가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정면으로 다룬 대서사시다. 대부분의 시가 기억과 감정을 바탕으로 쓰인다 해도, 이 시는 죽음을 직접 목도한 자리에서 바로 태어난 시적 기도이자 인간 존재에 대한 문학적 증언이다.


시가 시작되는 공간은 ‘강남역 G아르체 갤러리’다. 이곳에서의 전시와 조우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맞닿은 예술의 문턱이다. ‘빛과 그림자 사이로 그녀가 있었다’는 구절은 곧 시인의 눈앞에 펼쳐진 생의 반음영(半陰影)을 의미한다. 삶은 빛이지만 죽음은 그림자. 그 둘의 경계에 선 ‘그녀’는 라벤더 향기처럼 가볍고도 단단히 존재한다.


2. 임종의 순간, 시와 꽃의 직조


“시인님 펜이 됐어요. 기도해 주세요”라는 말은 단지 간청이 아니다.

이는 생의 마지막 길목에서 타인의 언어를 빌려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게 해 달라는 절실한 위탁이다. 그녀는 이미 말보다 향기에 가까운 존재로 이행 중이며, 자신의 미소조차 ‘붙잡고 있다’는 표현처럼, 존재를 끝까지 존엄하게 간직하려는 아름다운 투쟁을 보여준다.


박성진은 이 순간, “말보다 먼저 펜을 들었다”라고 한다. 이는 시인이 증언자이자 기도자로서 감히 말하기보다 먼저 느끼고 기록한 자임을 뜻한다. 말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시는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향기 하나를 손에 들고 그녀에게 건넨다. 그것이 라벤더 화분이다.


3. 꽃은 말이 없고, 말은 꽃이 되지 못할 때


이 시에서 가장 눈부신 행은 다음 구절이다.


> “꽃은 말이 없고

말은 꽃이 되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향기 하나를 남겼다”




이 부분은 시 전체의 철학적 요약이다. 인간은 꽃처럼 아름답지만 말로는 그 전부를 담을 수 없다. 꽃은 침묵 속에서도 향기를 통해 남는다. 이 시는 결국 한 송이 라벤더 화분이 사람의 마지막 이별을 대신한 시이며, 시가 언어로 남기지 못한 것을 향기로 대신한 행위임을 고백한다.


꽃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말은 죽지만 향기는 기억된다. 이때 향기는 곧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4. 시인의 윤리적 자세와 신앙의 심연


박성진 시인의 이 시는 단지 서정적 위로를 넘어선다.

이 시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믿음의 자매’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시인이 이 죽음의 자리에서도 생명을 창조하신 절대자의 품 안에 그녀를 의탁하는 신앙적 토대를 갖고 있음을 드러낸다. ‘나는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는 고백은 종교적 염결함, 예술적 침묵, 인간적 존중이 삼중적으로 엮인 구절이다.


그는 화려한 말로 죽음을 덮지 않는다. 오히려 말의 무능함과 시의 침묵을 인정하고, 향기의 지속성을 통해 진정한 위로를 건넨다. 그것이 이 시의 가장 큰 윤리적 가치이며, 미학적 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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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한 송이 라벤더로 영원을 쓴 사람”


박성진의 〈보랏빛 라벤더의 향기〉는 임종의 시간, 시인의 존재 이유를 깊게 성찰하게 한다.

한 여인의 마지막 시간에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았다. '기도'를 썼고, '향기'를 건넸고, '침묵'을 지켰다.

이 세 가지가 곧 이 시를 구성하는 골격이며, 그를 시인답게 만든 실존의 순간들이다.


그녀의 딸과 아들이 지켜보는 병실에서, 그는 눈물이 아니라 향기를 건넸고, 말이 아니라 꽃을 전했다.

그리하여 시는 향기가 되었고, 향기는 기도가 되었고, 기도는 매일 피어나는 사랑이 되었다.


이 시는 말한다.

**“인간의 마지막은 향기로 기억될 수 있다”**고.

그것이 시가 할 수 있는, 그리고 가장 깊은 위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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