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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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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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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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휘 시
태양이 정수리 위에 멈추고
그림자는 발밑에서 숨을 고른다
나는 빛 속에 서서
허상과 진실 사이를 바라본다
눈부심이 나를 태우지만
그 빛 속에서만
참된 형상이 숨을 터놓는다
모래는 뜨겁고
바람은 멀리서 다가오지만
나는 멈추지 않는다
이 길 끝에
나를 기다리는 것은
또 하나의 계절이 아니라
영원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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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이 시는 마치 정오의 태양 아래 홀로 서 있는 한 인간의 내면 여정을 그린 듯합니다.
첫 구절, ‘태양이 정수리 위에 멈추고’ — 여기서 태양은 단순히 계절의 열기가 아니라, 인생의 절정이자 피할 수 없는 진실의 빛처럼 다가옵니다. 그림자가 발밑에서 숨을 고른다는 건, 모든 외부의 허상과 길이가 사라지고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자리, 바로 나의 발밑까지 진실이 다가왔음을 뜻하죠.
‘나는 빛 속에 서서 허상과 진실 사이를 바라본다’ 이 장면은 진리 앞에 선 철학자의 모습입니다. 허상과 진실은 늘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경계에 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 경계 위에서, 마치 바람 한 줄기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서 있습니다.
‘눈부심이 나를 태우지만 그 빛 속에서만 참된 형상이 숨을 터놓는다’ 고통의 역설입니다. 눈부심은 고통으로 타오름은 불편함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만 본질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플라톤이 동굴에서 바깥의 빛을 처음 마주하는 순간 환한빛으로 밝아옵니다
‘모래는 뜨겁고 바람은 멀리서 다가오지만 나는 멈추지 않는다’ 모래는 당장 버겁고, 바람은 아직 희망처럼 멀리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멈추지 않습니다.
여기서 ‘순례자’라는 말이 부활합니다. 순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고, 돌아가는 길이 없는 여정입니다.
마지막 구절 ‘또 하나의 계절이 아니라 영원의 얼굴이다’ 순례자가 찾는 계절처럼 변하는 것, 눈앞의 보상이 아닙니다
한 번 만나면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의 무엇입니다. 영원의 얼굴이라는 표현이 그 절정의 순간을 한 이미지로 압축합니다.
이 시는 뜨거운 여름이라는 환경을 빌려, 인간이 허상과 진실 사이를 건너며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고난과 눈부심을 견디며, 끝내 변치 않는 ‘얼굴’을 마주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담은, 짧지만 깊이 있는 철학적 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