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이어령 선생님의 헌팅턴비치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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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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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팅턴비치에 가면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네가 운전하며 달리던 가로수 길이 거기 있을까
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
바람처럼 스쳐간 흑인 소년의 자전거 바큇살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을까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아침마다 작은 갯벌에 오던 바닷새들이 거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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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질문의 노래, 부재의 숨결》
이 시는 마치 이별 후 남겨진 집의 창가에 서서, 그 빈 방을 향해 조심스레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시작한다. 그러나 질문은 단순한 회상이나 확인이 아니다. “있을까”라는 반복은 응답을 기대하는 물음이 아니다 부재한 존재를 다시 불러내는 주문 같은 언어로 시작한다. 이어령 선생님의 질문은 바람 속에 흩날리며 사라진 듯 보이지만, 그 울림이
닿은 자리마다 사라진 이의 흔적은 다시 부활하여 살아난다.
처음의 질문은 좁다. 집, 차고, 문을 여는 소리, 일상의 미세한 장면들이 호명되었다.
그러나 그 작은 장면들 속에는 한 사람의 삶 전체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 기억이 불리자, 곧 시선은 넓어진 길이 보인다. 가로수 길, 하얀 언덕길, 햇살에 반짝이는 자전거, 그리고 아침마다 작은 갯벌에 날아들던 바닷새의 추억은 점차 세계로 뻗기 시작하였다 확장된 부재의 ‘너’는 더 이상 한 사람의 초상에 머무르지 않았다 풍경과 자연, 세계 전체 속에 흩어져 살아 있는 뿌리 깊은 존재가 된다. 부재는 오히려 더 넓고 깊은 현존으로 이행하는 여정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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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의 사유와 윤동주의 시혼》
이어령 선생님은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는 것, 다른 방식의 삶”이라 쓰셨다. 그 말은 이 시의 모든 물음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변형이었고, 부재는 소멸이 아니라 변주다. 그러므로 이 시의 “네가 있을까”라는 질문은 단순히 사라진 이의 흔적을 붙잡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부재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 있는 존재를 확인하는 행위임을 인식한다
윤동주는 별빛 아래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답은 끝내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 물음이야말로 그의 시혼을 오늘까지 지속시키어 살려 두었다. 이어령 선생님의 질문도 그렇다. 대답을 들을 수 없을 때조차, 질문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증언이 되었다.
응답 없는 질문은 부재를 더욱 강렬하게 드러내며, 시대를 넘어선 존재의 증거가 되었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궁극적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고 했다.
이 시의 질문들이 바로 그렇다. 삶과 죽음, 현존과 부재라는 궁극적 상황 속에서, 질문은 더 깊은 층위의 존재를 불러내기에 이른다. 답이 없기에, 질문은 더욱 울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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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스며든 부재자의 얼굴》
언덕길의 바람, 아침 햇살, 갯벌의 바닷새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처럼, 자연은 부재한 ‘너’의 얼굴이 되어 화자를 응시한다. 바람결은 네가 남긴 목소리처럼 들려온다 햇살에 반짝이는 자전거 바큇살은 네가 지나간 흔적을 새벽빛 속에 그려내었다.
갯벌에 날아드는 바닷새들의 울음도 네가 없는 자리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대화의 목소리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기억을 “과거의 그림자가 아니라 현재로 다시 살아나는 동반자”라 말한다.
이 시에서 질문은 과거를 되짚는 행위가 아니라, 사라진 ‘너’를 지금 이 순간의 동반자로 불러내는 창조적 기억이며 기억을 환기시키는 향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들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으로 본다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마다 ‘너’는 다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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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사유의 시적 확장》
이어령 선생님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 “인간은 흙이 되어도, 바람이 되어도 끝나지 않는다”라고 쓰셨다. 이 시는 그 말씀의 문학적 증명이 되었다. 사라진 존재는 흙으로 간다 바람으로, 햇살과 바닷새의 추억으로 남는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현존이다
윤동주가 별빛 언어로 조국과 청춘의 부재를 불러냈듯이 이어령 선생님의 질문은 부재한 ‘너’를 세계 속으로 다시 불러내었다. 개인적 서정은 세계적 시학의 연장선으로 확장되고, 질문은 단순한 상실의 언어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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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그러나 더욱 있음》
결국 이 시가 전하는 것은 “없음의 철학”이다. 부재는 결코 단순한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고 넓은 방식으로 드러나는 있음이다.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라는 마지막 물음은 끝내 대답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미완의 질문 속에서, 존재는 더욱 생생히 살아난다. 없음은 더욱 있음으로 변한다.
헌팅턴비치의 바람, 언덕길, 바닷새의 울음은 모두 부재자의 또 다른 얼굴이다. 질문이 이어지는 한,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어령 선생님의 물음은 윤동주의 별빛 같은 질문과 더불어, 존재가 끝나지 않음을 증언하였다.
부재는 상실이 아니다 세계 속에서 더욱 넓게 살아 있는 현존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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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이 시는 슬픔의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질문으로 이어지는 부재의 노래이며, 없음 속에서 더욱 깊어지는 있음의 증언이다. 이어령 선생님의 물음은 윤동주의 물음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간의 존재가 죽음과 부재를 넘어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남음을 보여준다.
질문이 이어지는 한, 존재는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언덕길의 바람결과 갯벌의 바닷새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 부재자를 만난다. 그것이 이 시가 남기는 이어령 선생님의 가장 깊은 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