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화, 문학평론가
박성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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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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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자 시인 시
나는 의자가 있는 곳에서 보자고 했고
친구는 길에서 만나자고 했다
여덟 시에 보자던 약속이었다
늦지 않겠다던 다짐은
조금 늦겠다는 문자로 바뀌어 왔다
나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길 위에 발자국을 세어야 했다
아침부터 찌는 여름 공기
출근 인파는 나를 지나치며
강물처럼 흘러갔다
시간 위를 서성이며
약속 자리만 빙빙 돌았다
기다림은
한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심한 듯 찍혀 오고
나는 시간의 바퀴를 굴린다
더 오래 기다린다 해도
그건 결국 나의 일,
시간을 얻어
이 순간을 다져 쌓듯
길 위에 변치 않을
우정의 돌 하나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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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기다림의 일상과 시적 승화>
변희자 시인의 〈기다림〉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의 작은 장면을 정교하게 포착한 것이다 단순히 약속을 지키지 못한 친구를 기다리는 상황처럼 보이지만,
이 시는 그 시간 속에서 관계의 의미, 사회적 시선, 그리고 존재적 성찰을 끌어올린다. 평범한 기다림을 ‘우정의 돌 하나’라는 상징적 결말로 전환시킨다 기다림은 곧 삶을 지탱하는 의지의 형상임을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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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구조 지연에서 증표로>
이 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머리에서는 약속의 설정이 드러난다. 의자라는 안정적 공간과 길이라는 유동적 공간의 대비가 등장하였다.
이는 고정된 자리와 흘러가는 세계 사이의 긴장의 시간을 암시한다.
중간 부분에서는 기다림의 구체적 장면이 묘사된다. 더위, 출근 인파, 발자국, 문자 등 구체적 이미지가 쌓이며 독자에게 실제적 체험감을 주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기다림이 단순한 지루함을 넘어 의미로 전환되었다. 기다림은 결국 나의 일이며,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니라 쌓아 올린 경험이라는 깨달음으로 마무리된다.
약속 지연이 ‘우정의 증표’로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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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체험 흐름에서 축적까지>
이 시의 핵심은 시간의 체험이다. 기다림은 언제나 시간을 체감하게 만든다.
시적 화자는 서성이고, 빙빙 돌며, 바퀴를 굴린다고 표현하였다.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화자의 몸짓과 감각 속에서 물리적으로 재현된 것이다.
특히 "나는 시간의 바퀴를 굴린다"라는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보통 시간은 인간을 끌고 가는 거대한 힘으로 인식되지만, 여기서는 시적 주체가 능동적으로 시간을 굴린다. 이는 기다림을 수동적 고통이 아니라, 의미를 창조하는 주체적 행위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에 "시간을 얻어 이 순간을 다져 쌓듯"이라는 표현은 기다림을 허비가 아니라 축적으로 승화하였다. 기다림은 공허한 공백이 아니다 우정을 더욱 단단히 다지는 과정임을 드러낸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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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시선과 자아의 흔들림
길 위에서의 기다림은 단지 친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자아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심한 듯 찍혀 오고"라는 구절은 기다리는 이가 느끼는 낯섦과 불안, 사회적 압박을 포착한다. 기다림은 개인적 사건이지만, 동시에 타인의 시선 속에서 노출되는 사회적 경험이 되었다 다.
이 장면은 현대인의 일상적 고독을 잘 드러낸다. 도심의 인파 속에서 한 사람의 기다림은 부각되고, 그 고독은 시선의 무게로 증폭된다. 그러나 화자는 그 무심한 시선을 견디며, 오히려 시간을 굴리고 다져 쌓는 주체로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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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의 의미
돌 하나 올리기>
마지막 연은 시 전체의 핵심이다. "길 위에 변치 않을 우정의 돌 하나를 올린다." 기다림은 결국 우정에 대한 헌신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상대방의 지각이나 무책임을 탓하지 않고, 그 시간을 의미 있는 ‘증표’로 변환하는 태도인 것이다.
‘돌’이라는 이미지는 변하지 않는 단단함을 상징한다.
길 위의 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돌을 올린다는 행위는 우정의 지속성을 다짐하는 의례적 몸짓이다. 기다림이 불만이나 분노로 끝나지 않고,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신성한 의식으로 승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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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속 기다림의 계보>
한국 현대시에서 기다림은 자주 다루어져 왔다. 윤동주의 시에서는 기다림이 별과 미래를 향한 청년의 갈망으로, 김소월에게는 그리움의 정조로 나타난다. 변희자 시인의 〈기다림〉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지극히 구체적인 일상 속 장면을 통해 현대적 변주를 이루고 있다.
이 시의 독창성은 ‘지연된 약속’이라는 일상적 소재를 통해, 시간의 본질과 관계의 본질을 동시에 드러냈다는 점에 있다. 단순히 지루한 체험이 아니라, 우정을 굳히는 의례로 재해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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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기다림의 윤리와 시학
〈기다림〉은 일상의 사소한 장면을 통해 인간관계의 윤리적 태도를 보여준다. 기다림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시간을 축적하고 관계를 다지는 행위이다.
시인은 기다림 속에서 주체적으로 시간을 굴리고, 사회적 시선을 견디며, 결국 우정의 돌 하나를 올린다.
이 시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기다림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가?" 기다림을 허비라 여길 것인가, 아니면 우정과 사랑의 돌 하나로 쌓아 올릴 것인가. 변희자 시인은 후자를 선택하며, 기다림을 삶의 윤리로, 시학으로 승화시킨 시로 울림을 주는 작품으로 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