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란 바람의 시 7---가을바람이 쓰는 시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



정해란 시인 시


〈바람의 시 7 — 가을바람이 쓰는 시〉


정해란 시인


바람의 시원始原은 어디쯤일까

사방에서 방향 열어 부는 갈바람


어지러운 세상사 잠시 잊으라고

어느 노승이 풍경소리와 함께

색도 무게도 뺀 채 보내는 걸까


긴 그리움의 사리 꺼낸 애절한 노래

하염없이 흐르던 선율의 언덕에서

맑은 음색으로 함께 불어오는 걸까


폭염과 폭우에 절은 세포마다

문 열어 남김없이 헹궈주는 바람


돌아서도 또다시 그리운 그림자

우리들의 먼 추억에서 불어와

둘 사이의 초록 평원 건너오는 걸까


가슴에서 가슴으로 불어오는 바람

온몸의 감각을 낱낱이 세워주니

또 다른 시詩가 휘청이며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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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바람과 시의 정해란 시인의 시는 바람을 시와 동일한 차원에서 사유한다. “바람의 시원始原은 어디쯤일까”라는 물음은 곧 “시는 어디서 비롯되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이 된다.

자연의 바람이 모든 방향에서 불어오듯, 시 또한 삶의 수많은 국면과 감각에서 불쑥 솟는다. 시인은 이 바람과 시의 친연성을 처음부터 독자 앞에 놓으며 작품의 방향을 정초 한다.



< 갈바람과 혼돈의 세계>


“사방에서 방향 열어 부는 갈바람”은 단순한 계절의 풍경이 아니라, 어지러운 시대를 상징한다. 갈바람은 제멋대로 불어 삶의 균형을 흔들지만, 동시에 우리를 각성시키는 힘을 가진다.

이처럼 시인은 갈바람을 통해 인간 존재가 늘 혼돈 속에서 살아가며, 그 혼돈을 견디는 과정 자체가 서정의 토대임을 보여준다.



< 노승과 풍경소리, 무소유의 바람>


이어지는 대목에서 바람은 “어느 노승이 풍경소리와 함께 / 색도 무게도 뺀 채 보내는 걸까”라는 형상으로 변한다.

불교적 색채가 짙게 배어 있는 이 장면은 바람을 수행자의 숨결처럼 느끼게 한다. 무게 없는 바람은 곧 무소유의 상징이며, 집착과 번뇌를 비우는 깨달음의 은유가 된다.

여기서 시인은 바람을 초월적 자유의 기호로 격상시킨다.



< 그리움의 사리와 음악적 울림>


“긴 그리움의 사리 꺼낸 애절한 노래”라는 구절은 시 전편에서 가장 선율적인 순간이다.

사리는 불교에서 영혼의 결정체인데, 시인은 그것을 ‘그리움’과 연결한다.

곧, 인간의 정서적 응결체가 바람을 만나 노래로 흩어진다는 의미다.

이때 바람은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 아니라 음악으로 변환되는 존재이며, 인간 내면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매개가 된다.


<선율의 언덕과 내적 공명>


“하염없이 흐르던 선율의 언덕에서 / 맑은 음색으로 함께 불어오는 걸까”라는 표현은 바람을 청각적 울림으로 형상화한다.

언덕은 소리의 파동이 퍼지는 공간이고, 바람은 그 파동을 더욱 넓게 확산시키는 도구다.

시인은 여기서 바람을 음악적 교감의 언어로 바꾸며, 시가 곧 음악이자 감각의 진동임을 암시한다.


< 폭염과 폭우, 상처 입은 세포들>


시 속 바람은 치유자의 성격도 지닌다.

“폭염과 폭우에 절은 세포마다 / 문 열어 남김없이 헹궈주는 바람”이라는 표현은 인간 존재의 가장 미세한 단위까지 바람이 스며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통에 시달린 세포 하나하나가 바람에 씻겨나가듯, 시 또한 인간의 상처를 정화한다.

바람은 자연이자 동시에 치유적 언어다.



<그림자의 바람, 기억의 환기>


“돌아서도 또다시 그리운 그림자”라는 대목은 바람이 과거를 되살리는 기능을 지님을 말해준다. 그림자는 부재의 흔적이지만, 바람은 그것을 현재로 불러온다.

결국 바람은 기억을 소환하는 힘이 된다.

이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시적 장치이자, 시가 망각을 거슬러 기억을 붙잡는 예술임을 드러낸다.



<초록 평원, 바람의 공간적 이동>


바람은 “우리들의 먼 추억에서 불어와 / 둘 사이의 초록 평원 건너오는 걸까”라는 구절에서 공간을 횡단한다.

초록 평원은 청춘과 생명의 풍요를 상징한다.

시인은 바람이 그 평원을 건너 두 존재를 이어주리라 상상한다.

이때 바람은 단절을 메우고, 관계를 잇는 다리로 기능한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교감의 언어>



마지막 연에서 바람은 인간 사이의 교감으로 구체화된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단순히 자연의 현상이 아니라 심리적·정신적 호흡이다.

이 바람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의 전달, 사랑의 숨결을 의미한다.

바람은 인간을 서로 연결하는 가장 원초적인 매개다.


<감각의 각성과 시의 발생>


“온몸의 감각을 낱낱이 세워주니 / 또 다른 시詩가 휘청이며 돋는다.

” 시인은 바람을 창작의 기원으로 규정한다. 바람은 감각을 일깨우고, 그 감각이 새로운 언어와 이미지를 낳는다.

따라서 바람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가 태어나는 동력이며, 창작의 원천이다.



<바람의 초월성과 존재론>


바람은 끝내 초월적 차원으로 도약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감각할 수 있고, 붙잡을 수 없지만 모든 것을 흔드는 힘이 바람이다. 그것은 곧 존재론적 원리이며, 시인이 말하는 “또 다른 시”의 발생을 가능케 하는 실존적 토대다. 정해란은 이 바람을 통해 인간 존재의 가벼움과 동시에 무한성을 드러낸다.



<한국 서정시 전통 속 바람>


한국 서정시는 바람을 오래도록 중요한 소재로 다뤄왔다. 김소월의 “바람이 불어”는 사랑의 이별을, 백석의 시에서의 바람은 고향의 향수를 환기한다.

정해란의 바람은 이 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도, 보다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차원까지 확대된다.

단순히 감각적 배경이 아니라, 존재와 시의 기원을 묻는 물음으로 확장된 것이다.


<결론>

바람에서 시로

결국 이 시의 종착지는 “또 다른 시가 휘청이며 돋는다”라는 구절이다.

바람은 존재의 기원, 기억의 소환, 상처의 치유, 교감의 매개, 창작의 동력으로 기능하며, 모든 과정 끝에 시를 낳는다.

정해란은 바람과 시를 서로 호명하며, 자연과 인간, 존재와 언어를 잇는 원초적 서정을 완성한다.

바람은 시이고, 시는 바람이다.

이 상호 호환적 관계 속에서 독자는 자신 안의 감각과 기억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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