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자 시인--어머니의 색실은 꽃씨였다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

어머니의 색실은 꽃씨였다


변희자 시인


맑은 창가에 앉아

어머니는 조용히 자수를 놓으셨다

반쯤 열린 창으로 스며든 햇살은

자수틀 위 실오라기에 내려앉고


무명실, 비단실

곱게 물들인 가는 실들이

앞뒤로 오가며

한 올 한 올, 씨앗처럼 박히면

하얀 천 위에 꽃이 피었다


무릎 위 자수틀 위에는

손끝에 머문 마음이

바늘을 따라 흐르며

고운 꽃밭을 일구어냈다


어머니의 실은 씨앗이었고

바늘은 예술가의 붓이었다

햇빛 없는 날에도

바람처럼 피어나

침묵 속에서도 노래하던 꽃들


꽃 사이사이 펼쳐 놓으신

향기로운 보금자리


어머니의 꽃꽂이는 멈췄지만

오색의 씨앗들은 꽃 구릉 건너

오늘도 향기로 나를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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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무대와 어머니의 손길>


이 시는 어머니가 창가에서 자수를 놓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햇살이 실오라기에 내려앉는 세밀한 묘사는 단순한 생활 풍경을 넘어, 일상 속에 스며든 빛의 은총을 보여줍니다.

자수틀 위에서 흘러가는 바늘놀이는 생계와 노동을 넘어 ‘예술적 창조’의 순간으로 확장됩니다.


<실과 씨앗의 상징성>


실이 씨앗처럼 박혀 꽃이 되는 이미지는 탁월한 은유입니다. 어머니의 노동은 씨앗을 뿌리고 꽃을 피우는 자연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바느질은 단순한 생활 기술이 아니라 ‘생명을 이어가는 행위’이며, 하얀 천은 밭처럼 해석됩니다.

이는 여성의 노동을 생명 창조의 차원으로 고양시킨 시인의 관점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예술과 모성의 합일>


“바늘은 예술가의 붓이었다”라는 구절은 생활과 예술을 연결하는 핵심 구절입니다.

어머니의 바느질은 화가의 붓질과 동일한 가치를 부여받으며, 그 안에는 손끝의 마음과 시대적 정서가 스며듭니다. 햇빛 없는 날에도, 침묵 속에서도 피어난다는 표현은,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생명과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모성의 힘을 상징합니다.


<기억과 계승의 서정>


마지막 연에서 “어머니의 꽃꽂이는 멈췄지만 / 오색의 씨앗들은 꽃 구릉 건너 / 오늘도 향기로 나를 감싸고 있다”라는 부분은 기억의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어머니의 손길이 멈췄지만, 그 흔적과 정신은 여전히 현재의 삶을 감싸며 이어집니다.

어머니의 자수는 단순히 과거의 행위가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도 향기로 살아 있는 정신적 유산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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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합 평론>


변희자 시인의 이 작품은 일상적 풍경 속에서 예술과 생명의 근원을 발견하는 서정시입니다. 자수라는 소재는 한국적 여성 노동의 전형을 담고 있으면서도, 단순 노동을 넘어 예술, 창조, 모성의 차원으로 고양됩니다.


시인은 바느질의 반복을 씨앗 뿌림과 꽃 피움으로 확장하며, 어머니의 손길을 우주적 창조 행위에 비견합니다.

또한 ‘멈춘 꽃꽂이와 이어지는 향기’라는 대조를 통해, 삶은 멈추지만 정신은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로써 작품은 개인적 기억을 넘어 보편적 어머니의 이미지, 더 나아가 한국적 모성 예술의 찬가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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