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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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초 시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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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 한 잔〉
쓸쓸함 한 잔
드실까요
초가을 맑으나 맑은
말씀으로
고여서 오는
초가을 높으나 높은
하늘빛깔의
머언
그리움
한 숟갈 넣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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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안혜초 시인의 시 〈쓸쓸함 한 잔〉은 고독의 감정을 삶의 지혜로 바꾸는 시적 장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의 출발은 “쓸쓸함 한 잔 드실까요”라는 다정한 초대다.
시인은 쓸쓸함을 독백이나 고립의 감정으로 두지 않고, 마치 차 한 잔 권하듯 타인과 나누려 한다. 이때 쓸쓸함은 더 이상 부정적 정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된다.
초가을이라는 계절적 배경은 이 시를 특별하게 한다.
맑고 높은 하늘, 머언 그리움은 모두 쓸쓸함의 성분이 된다.
그리움과 고독은 초가을의 맑은 공기처럼 잔에 담겨 고인다.
마지막 구절의 “한 숟갈 넣어서”는 큰 정서를 일상의 친밀한 행위 속에 녹여내며, 쓸쓸함을 감각화한다.
따라서 이 시는 짧지만, 고독을 견디는 방식과 나누는 태도를 제시하는 삶의 작은 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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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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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의 언어 “드실까요”의 힘>
대부분의 서정시는 내면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안혜초 시인의 이 시는 “드실까요”라는 대화체로 열리며 독자를 시적 공간으로 불러들인다.
이는 시적 주체가 고독을 혼자 감당하지 않고, 타자와 나누려는 적극적 의지를 보여준다.
독자는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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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의 구체화 – 쓸쓸함이 한 잔이 될 때>
쓸쓸함은 본래 막연한 감정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한 잔”이라는 감각적 사물로 전환한다. 감정은 이제 마실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대상으로 변모한다.
이는 추상의 구체화이며, 쓸쓸함을 체험 가능한 음료로 만든다.
독자는 이를 통해 시적 감정을 실제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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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맑음과 언어의 투명성>
“초가을 맑으나 맑은 말씀으로 고여서 오는”은 계절과 언어의 결합이다. 초가을의 청명함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언어 속에 고이는 성분으로 형상화된다. 시인은 계절을 빌려 쓸쓸함의 맑은 빛깔을 드러낸다.
언어는 여기서 투명한 그릇이 되어 감정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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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음과 먼 그리움의 수직·수평 구조>
“높으나 높은 하늘빛깔”과 “머언 그리움”은 수직과 수평의 축을 이룬다. 높음은 초월을, 멂은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암시한다.
이 두 이미지는 쓸쓸함을 단순한 정서가 아니라 존재론적 거리감으로 확장한다.
시적 고독은 여기서 초월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층위를 동시에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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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의 친밀성 – 초월의 일상화>
마지막 구절 “한 숟갈 넣어서”는 시적 전환의 지점이다.
앞의 장엄한 이미지들이 일상의 숟가락과 만난다.
이는 고독과 그리움이 결국 일상 속에서 다루어지는 감정임을 보여준다. 쓸쓸함은 우주적 고독이면서 동시에 식탁 위의 친밀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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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와 여백 동양적 미학>
시의 언어는 절제되어 있다. 여백이 많고, 구절은 짧다. 이는 수묵화의 여백처럼 독자에게 상상과 해석의 공간을 남긴다.
절제된 언어는 오히려 깊은 울림을 주며, 독자가 스스로 자기 경험을 투사하게 한다.
이는 동양적 미학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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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적 서정시 현대적 의미>
안혜초 시인의 시는 대화적이다. 독백이 아닌 초대, 고립이 아닌 나눔으로 시작한다.
이는 현대인의 고립된 정서를 치유하는 방식이다.
독자는 시를 읽으며 고독을 혼자가 아닌 함께 마시는 경험으로 바꾼다. 이는 현대 서정시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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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신학적 울림>
“말씀으로 고여서 오는”이라는 표현에는 종교적 함의가 있다.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신의 언어를 암시한다. 따라서 쓸쓸함조차 신성한 의미 속에서 정화된다. 시인의 기독교 문학적 배경은 이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쓸쓸함은 영적 체험으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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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의 미학적 승화>
보통 쓸쓸함은 회피해야 할 감정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음료처럼 권한다. 이는 고독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예술적 향유의 대상으로 전환한 것이다. 고통은 여기서 미학으로 승화된다. 쓸쓸함은 견뎌야 할 짐이 아니라 맛볼 수 있는 경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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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와 공감의 언어>
디지털 사회에서 개인은 점점 고립된다.
이 시는 그런 사회 속에서 쓸쓸함을 함께 나누자는 제안이다. “드실까요”라는 다정한 물음은 독자의 외로움을 덜어내는 공감의 언어다.
시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적 정서를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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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시학과의 변주>
고전 시가에서 쓸쓸함은 자연의 허무와 밀접했다. 그러나 이 시는 자연과 생활, 감정을 결합해 현대적 쓸쓸함을 제시한다.
이는 전통과 현대를 이어주는 창조적 변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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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성과 존재의 투명성>
시의 언어는 단순하지만, 그 안에 존재론적 투명성이 있다. 독자는 시를 읽으며 자신의 쓸쓸함을 잔에 따라 마시는 듯한 체험을 한다. 단순성은 깊은 사유로 이어지고, 시는 독자의 내면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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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나눔으로써의 시학
〈쓸쓸함 한 잔〉은 짧지만 시학적 선언이다. 고독을 나누는 잔으로 바꾸어, 인간학적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 시는 오늘날 한국 서정시의 중요한 성취이며, 쓸쓸함을 공유 가능한 감정의 문화로 승화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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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초 시인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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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현대문학》 추천 완료 등단
시집: 《귤》, 《레몬》, 《탱자》, 《달 속의 뼈》, 《쓸쓸함 한 잔》, 《살아있는 것들에는》, 《詩쓰는 일》 등 7권
역시집》 한영대역시집 《우리들의 맨 처음 고향은, 사랑》, 중국어역시집 《우리 사랑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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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윤동주문학상, 한국기독교문학상, 영랑문학상 대상, 문학 21상 대상, 한국문학예술상 대상, 이화를 빛낸 상, 서울문예상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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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국제펜 한국본부 자문위원, 세계여기자 작가협회 한국지부 부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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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한국문협 대외협력위원, 한국현대시협 부이사장, 지도위원, 한국기독교문학회 고문, 서울시협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