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
시조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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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의 밤 밀롱가 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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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시인
오세요, 경쾌하게 4분의 2박자로 어렵게 재지 말고
긴장감도
내려놓고 꽃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당겼다 멈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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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관객을 향한 초대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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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을 부르는 첫 호명>
“오세요”라는 단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관객을 직접 불러들이는 손짓이다.
시인은 독자와 거리를 둔 채 독백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무대 위의 공연자처럼 관객을 향해 목소리를 던진다. 이는 시조가 가진 고유의 노래성과 공연성이 현대적 방식으로 되살아난 지점이다.
관객은 그 초대의 순간,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무대의 공동체로 편입된다.
무대와 객석 사이의 벽이 무너지고, 시는 관객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이러한 호명은 예술이 늘 관객을 필요로 한다는 근본적 진리를 상기시킨다.
시가 존재하려면 누군가 그것을 읽고 듣고 공명해야 하듯, 탱고 또한 춤추는 몸과 그것을 바라보는 눈빛 사이의 교감에서 완성된다.
김민정 시인의 시조는 이 첫 호명으로 관객을 무대 위의 세계로 끌어올리며, 시와 춤이 함께 어우러지는 밤의 장을 열어젖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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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의 문턱 4분의 2박자>
“경쾌하게 4분의 2박자로 어렵게 재지 말고”라는 대목은 탱고의 핵심을 관객에게 직접 설명하는 듯하다.
탱고는 단순한 음악적 장르가 아니라, 리듬 속에서 인간의 감정을 풀어내는 체험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경쾌함’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탱고는 슬픔을 품고 태어났지만, 동시에 경쾌함으로 승화되었다. 관객은 이 구절을 통해 음악의 무게를 머리로 계산하는 대신, 몸으로 받아들이라는 권유를 받는다. 삶 또한 그렇다. 우리는 흔히 삶을 계산하고 저울질하지만, 시인은 관객에게 그저 한 걸음 내딛고, 리듬에 몸을 싣고, 순간의 울림을 즐기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단순한 춤의 지침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내는 방식에 대한 은유다. 탱고의 문턱에서 우리는 음악과 더불어 존재의 가벼움을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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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과 해방 몸의 언어>
“긴장감도 내려놓고”라는 구절은 관객이 춤을 바라보며, 혹은 춤에 참여하며 스스로의 경직을 풀라는 초대다. 탱고는 기본적으로 긴장과 해방의 교차로 이루어진 춤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와 허리를 붙잡고, 숨결을 맞추며,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 긴장은 무겁지 않다. 긴장이 있기에 해방이 가능하고, 해방이 있기에 다시 긴장이 필요하다.
시인은 관객에게 이 춤의 본질을 알려준다. 이는 단순한 무용적 현상이 아니라 철학적 체험이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긴장 속에 놓여 있지만, 그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맛볼 수 있다. 탱고는 그 사실을 몸으로 증명한다. 따라서 관객은 이 시조를 통해 춤을 보는 동시에, 자기 존재의 몸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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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의 심장>
“꽃피는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구절은 도시의 지리적 위치를 넘어선 은유적 상징이다. 관객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한 항구 도시가 아니라, 탱고가 꽃피운 심장부로 인식된다.
그곳은 수많은 이민자들이 모여든 용광로였다. 고향을 잃은 이들은 외로움과 설움을 반도네온의 음률에 담아냈고, 그것은 탱고가 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비애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픔 속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
시인은 바로 그 점을 포착해 ‘꽃피는’이라는 형용사로 도시를 묘사한다.
관객은 그 표현을 통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단순한 무대의 배경이 아니라, 스스로 춤추는 생명체로 경험한다.
탱고는 도시의 심장이며, 도시 자체가 살아 숨 쉬는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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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무대 밀롱가의 풍경>
밀롱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마다 열리는 탱고의 연회장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모른 채 어깨를 내어주고, 음악에 맞춰 리듬을 나눈다.
관객은 시인의 시조를 통해 그 풍경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감각을 얻는다.
밀롱가는 단순한 무도회장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계급을 넘어선 만남의 장소이며, 낯선 이들이 춤을 통해 한 몸이 되는 마법의 공간이다. 관객은 그곳에 서 있는 듯한 체험을 한다. 김민정 시인의 시조는 이 현장을 간단한 언어로 압축해 내지만, 그 울림은 장대하다. 문학기행을 하는 독자가 실제로 밀롱가에 간다면, 바로 이 시조의 첫 구절을 떠올리며 춤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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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의 미학>
“당겼다 멈춘 사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탱고의 핵심적 미학을 압축한다. 탱고는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멈춤이다. 두 사람이 발걸음을 내딛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숨을 멈추는 순간, 관객은 극도의 긴장과 해방을 동시에 경험한다. 이 정지는 단절이 아니라 더 큰 흐름을 위한 준비다.
마치 삶에서 잠시 멈추어 서는 순간이 새로운 출발을 가능케 하듯, 탱고의 멈춤은 또 다른 리듬의 시작이다. 시인은 이 찰나를 놓치지 않고 시조의 종장에 담았다.
관객은 이 순간을 통해 춤의 미학뿐 아니라 삶의 리듬까지 사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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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음악의 융합>
이 시조는 문학과 음악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드는 융합의 예술이다. 시조는 본래 노래와 함께 낭송되던 정형시다.
여기에 탱고라는 음악적 리듬을 겹쳐놓음으로써, 시인은 두 예술을 병치시킨다. 관객은 시를 읽으면서 동시에 음악을 듣고, 춤을 본다. 한국의 전통 정형시와 라틴아메리카의 춤과 음악이 하나의 시 속에서 어울리며, 관객은 문학과 음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는 문학기행의 또 다른 차원과 예술 간 대화의 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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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의 특징 혼종성>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세계 곳곳에서 온 이민자들의 도시다.
스페인, 이탈리아, 아프리카, 독일 등 수많은 문화가 교차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탱고는 바로 그 혼종의 산물이다. 시인은 “꽃피는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짧은 구절에 이 복잡한 역사와 문화를 응축시켰다. 관객은 그 표현 속에서 혼종의 에너지를 느낀다. 서로 다른 뿌리가 얽혀 만들어낸 새로운 꽃, 그것이 탱고이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특징이다. 시는 도시의 역사적 맥락을 단숨에 드러내며, 관객에게 혼종성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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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의 체험 문학기행의 추억>
이 시조를 읽는 관객은 마치 실제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여행하는 듯한 체험을 한다.
라 보카 거리의 원색적인 집들, 산 텔모의 시장 풍경, 그리고 카페에서 들려오는 반도네온 소리가 시 속에서 되살아난다. 문학기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도시의 역사와 문화 속에 스스로를 비추는 일이다.
관객은 시조를 읽으며 자기 안에 남미의 리듬을 불러내고, 그 기억을 문학적 추억으로 간직하게 된다. 이는 문학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게 하는 능력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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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와 인간의 삶>
탱고는 삶의 은유다.
한 걸음 내딛고, 멈추고, 이끌리고, 돌고, 다시 서는 춤이다. 인간의 삶 또한 그렇게 흘러간다.
사랑과 상실, 기쁨과 슬픔, 이별과 재회가 얽히며 리듬을 만든다. 시인은 관객에게 이 사실을 몸으로 보여준다.
탱고는 춤이면서 동시에 인간 존재의 형상이다.
관객은 이 시조를 읽으며 단순한 무용을 넘어서 자기 삶의 궤적을 반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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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관객의 일체>
이 시조의 가장 큰 미학적 성취는 무대와 관객을 하나로 묶는 힘이다.
시인은 관객을 단순한 구경꾼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오세요”라는 첫 구절에서부터 관객은 무대의 일부가 된다. 음악은 관객의 귀를 흔들고, 춤은 관객의 몸을 따라 흔들리게 한다.
결국 관객은 객석을 떠나 무대 위로 올라간 듯한 체험을 한다. 이는 예술의 본질적 힘이다. 진정한 예술은 관객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고, 삶 자체를 예술로 변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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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다. 그것은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화려한 무대다. 라틴의 정열과 이민자의 설움, 도시의 활기가 뒤섞여 하나의 심포니를 이룬다. 시인은 그 밤을 ‘꽃피는’이라는 단어로 묘사했다. 꽃은 화려함과 동시에 덧없음을 상징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 역시 그렇다.
관객은 그 아름다움을 느끼면서도, 언젠가 꺼질 불빛의 화려함을 아쉬워하는 화려한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