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이오동 시인--- 시를 짝사랑하다》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



심산 이오동 시인


시를 짝사랑하다


나는 그녀의 거주지를 모른다

단 한 번도 거처를 알려주지 않았다


옷자락만 살짝 비치거나

머리끝만 내밀다가 사라지는 그녀는

번번이 나를 비껴갔다


깊은 밤 쓰디쓴 커피 한 잔과

백지 한 장을 앞에 놓고

그녀를 기다린다


달이 기울듯 기다림도 기우는데

백지에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았다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

뒤늦게 새벽을 깔고 눕는데,


나를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

밤에 짓눌려 문을 열어주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시를 짝사랑하다 평론>


<제목 「시를 짝사랑하다」에 담긴 역설>


제목은 이 시 전체의 열쇠다.

사랑이 아닌 짝사랑이라 명명했을 때, 이미 관계의 불균형과 좌절이 내포된다.

시인은 시를 사랑하지만, 시는 시인을 받아주지 않는다.

이는 ‘창작의 신비’와 ‘예술적 영감’이 인간의 의지로만은 불가능한, 초월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제목은 시 전체의 정조를 선취하며, ‘짝사랑’이라는 단어는 애절함과 무력함을 동시에 부여한다.




<“나는 그녀의 거주지를 모른다”>


첫 행은 시적 영감의 본질을 환기한다.

시인은 아무리 찾아도 ‘시’가 머무는 곳을 알 수 없다.

시가 머물 공간은 물리적 좌표가 아닌, 내면과 시간, 영혼의 틈새이기 때문이다.

거주지의 부재는 곧 ‘시의 자유로움’이며, 동시에 창작자에게는 근원적 결핍으로 다가온다.



<“옷자락만 살짝 비치거나 머리끝만 내밀다가”>


영감은 온전히 다가오지 않는다.

시적 언어는 전부를 내주지 않고, 단편적인 이미지만 흘린다. 옷자락과 머리끝은 시가 던져주는 힌트, 즉 시적 이미지의 파편이다.

그러나 시인은 늘 그 파편을 붙잡지 못한 채, 놓쳐버린다.

이것이 짝사랑의 고통이다.



<“깊은 밤 쓰디쓴 커피 한 잔과 백지 한 장”>


밤, 커피, 백지는 창작의 고전적 상징이다.

밤은 고독의 시간, 커피는 의지와 각성의 상징, 백지는 가능성과 동시에 절망의 무대다.

이 순간 시인은 온몸을 열어 기다리지만, 백지는 끝내 응답하지 않는다.

짝사랑의 가장 잔혹한 장면은 바로 이 ‘백지’다.



<“달이 기울듯 기다림도 기우는데”>


시간의 흐름이 기다림을 소멸시킨다.

달의 기울어짐과 기다림의 쇠락이 평행 구조로 배치되며, 시인은 달의 생리와 자신의 심리를 겹친다.

달이 기울면 어둠이 찾아오듯, 기다림이 끝나면 공허가 찾아온다.

짝사랑은 결국 허무를 낳는다.




<“백지에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았다”>


이 구절은 창작의 실패를 정직하게 고백한다.

‘발자국 하나’는 시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백지는 사랑의 증거가 남지 않은 공간, 시인에게는 ‘실패한 연애의 현장’이다. 짝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듯, 시 역시 시인의 언어에 응답하지 않는다.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 뒤늦게 새벽을 깔고 눕는데”>


지쳐가는 몸은 영혼의 무력감을 반영한다. ‘새벽을 깔고 눕는다’는 표현은 기다림이 끝내 무너지는 순간의 체념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짝사랑은 지치게 하고, 그 지침 속에 시인은 무방비로 쓰러진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


놀랍게도 시는 그가 포기한 순간 다가온다.

그러나 시인은 ‘밤에 짓눌려 문을 열어주지 못한다.’

이는 짝사랑의 본질을 다시 드러낸다.

시는 순간적으로 다가오지만, 시인은 그것을 붙잡을 힘이 없다.

사랑의 타이밍을 놓치는 순간처럼, 시의 발걸음도 사라진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새벽의 짧은 기회마저 놓친 후, 시인은 공허 속에서 아침을 맞는다.

사랑의 대상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는 짝사랑의 가장 쓰라린 귀결이다.

오직 시인의 열망만이 공중에 떠돌고, 현실은 허무와 침묵으로 남는다.



<시 전체의 구조적 해석>


시의 구조는 부재 단편적 출현에서 기다림으로 실패는 짧은 접촉 상실의 순환이다.

이는 짝사랑의 전형적 패턴과 동일하다. 시인은 시를 존재론적으로 사랑하지만, 시는 늘 타자의 자리에서만 머문다.

여기서 ‘시’는 여성으로 의인화되며, 에로스적 긴장 속에서 창작의 본질이 드러난다.



<시적 화자의 자기 고백성>


이 시는 단순한 서정이 아니라 창작론적 고백이다.

시인은 ‘시와의 관계’를 연애에 빗대어 설명한다.

사랑의 은유를 통해 시적 영감을 잡으려는 고투, 그리고 번번이 실패하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 시는 곧 시인이 시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메타시(詩)이다.



<“짝사랑”의 철학적 함의>


짝사랑은 본질적으로 불가능성과 맞닿아 있다. 인간이 예술을 소유하려는 순간, 예술은 도망친다. 예술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적 은총으로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따라서 시와의 관계는 ‘짝사랑’ 일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시학의 근본 진실을 담아낸 철학적 선언이다.



<종합적 결론>


심산 이오동의 "시를 짝사랑하다"는 시인과 시의 관계를 연애의 불균형으로 형상화한 메타시이다.

제목은 창작의 고통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며, 각 연은 사랑의 과정을 닮은 접근과 좌절, 기다림과 상실의 패턴으로 진행된다.

이 시는 단순히 시를 쓰지 못한 밤의 기록이 아니라, 시인이라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짊어져야 할 숙명을 서정적으로 증언한 것이다.

즉, 시인은 끝내 시를 짝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비극적 운명이야말로 시의 아름다움이며, 창작의 불가피한 진실인 것을 잘 드러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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