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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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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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情 이인애
꼭 깨라 꼭 깨요 꼭 깨~
일어나라 은둔자여!
동녘 하늘 여명이 밝는다
어제의 고통을 떨치고
잠 깨어 일어나라
12 간지,
그중 신의 열 번째 선물
축복의 기름 부음 받아
"시간의 자동 감지 센서"를
벼슬 깊숙이 장착한 수탉,
열성껏 신명 나게 훼를 친다
꼭 깨라 꼭 깨라 꼭 깨요~
어제의 상실과 어둠을 떨치고
절망의 늪을 새처럼 날아올라
또 다른 새벽을 열자
적막 속에 울려 퍼지는
숨 고르고 눈비비는 시간
희망의 새로운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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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
<“꼭 깨라”라는 외침의 시학>
세 번 반복되는 “꼭 깨라”는 단순한 기상 알람이 아니라, 인간 영혼을 향한 예언적 외침이다. 여기서 반복은 단순한 강조법을 넘어 주문(呪文)처럼 독자의 내면을 흔든다. 이 구절은 개인의 잠을 깨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무감각과 집단적 무기력을 깨우는 장치로 해석한다.
문학은 종종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위무(慰撫)의 언어가 되지만, 이 시의 출발은 달콤한 위로가 아니라 불편한 경종이다.
이는 마치 단테가 "신곡"의 서두에서 “우리 인생의 한가운데서 숲길을 잃었다”라고 고백하며 독자를 각성시킨 장면과도 닮았다. 시인은 수탉의 울음을 빌려 독자의 무의식을 깨뜨리고, 잠든 윤리의식을 일으켜 세운다.
<수탉의 알람, 존재론적 상징>
수탉은 농촌의 일상에서 새벽을 알리는 존재지만, 문화사적으로는 태양과 희망을 불러오는 신탁자로 기능해 왔다. 그리스 신화에서 수탉은 빛의 신 아폴론과 결부되었고, 기독교에서는 베드로의 회개를 알린 증언의 동물이었으며, 중국과 한국에서는 12 간지 중 열 번째 자리를 차지하며 새벽과 정의를 상징했다.
이 시에서 수탉은 “시간의 자동 감지 센서”라는 현대적 비유로 치환된다.
자연의 본능적 울음이 디지털시계처럼 정밀한 알림으로 읽히는 순간, 시인은 수탉을 자연과 문명 사이의 다리로 그린다.
즉, 이 수탉은 인간이 망각한 시간의 진리를 대신 울려주는 존재다.
<은둔자를 깨우는 문학의 호소>
“일어나라 은둔자여!”라는 구절은 사회적 차원에서 더 큰 함의를 가진다. 여기서 은둔자는 단순히 방 안에 숨은 개인이 아니라, 좌절과 상실 속에서 자기 자신을 봉인한 인간 군상이다. 정치적 억압, 경제적 실패, 개인적 상실 속에서 움츠린 이들에게 시인은 “잠 깨어 일어나라”는 호소를 던진다.
이는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의 정신과 맞닿는다. 절망과 퇴행 속에 은둔하는 인간을 일깨워,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게 하는 힘. 따라서 수탉의 울음은 단순한 자연의 현상이 아니라, 문학적·철학적 구원의 메타포로 작용하였다.
<12 간지와 우주적 시간관>
시인은 수탉을 “12 간지, 그중 신의 열 번째 선물”이라 부른다.
이는 동양적 세계관의 깊은 반영이다. 간지는 단순한 순환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와 인간 삶의 조화를 의미한다.
그중 닭은 유신(酉申)의 시간대를 맡아 하루의 전환점을 알린다.
시인은 이를 “신의 선물”로 격상시킨다. 수탉은 개인의 시계를 넘어, 우주적 새벽을 열어주는 존재로 자리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자연의 울음을 통해 우주적 질서를 노래하는 코스모스적 시학을 보여주었다.
<‘기름 부음’의 종교적 뉘앙스>
“축복의 기름 부음”이라는 표현은 성경적 맥락을 지닌다. 구약에서 기름 부 음은 왕과 제사장에게 내리는 신성한 위임의식이다. 수탉이 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예언자의 사명을 지닌 존재로 읽힌다는 뜻이다.
여기서 수탉의 울음은 자연적 소리가 아니라 예언자적 외침이다.
어둠을 거두고 빛을 부르는 그 소리는, 인간을 향한 하늘의 메시지로 전환된다.
시인은 종교적 상징을 빌려 수탉을 새벽의 사제로 세우며, 새날을 여는 성스러운 제의로 끌어올린다.
<벼슬과 권위의 변용>
""시간의 자동 감지 센서를 벼슬 깊숙이 장착한 수탉""이라는 표현은 기발하다. 수탉의 벼슬은 단순히 생물학적 기관이 아니라, 시간을 감지하는 왕관으로 해석된다.
이 이미지에는 두 겹의 의미가 있다.
첫째, 과학적 차원에서 이는 자연의 생체 시계다.
인간은 알람시계 없이는 새벽을 맞지 못하지만, 수탉은 본능적으로 우주적 시간을 감지한다.
둘째, 상징적 차원에서 벼슬은 왕관과 같아 수탉을 시간의 군주로 만든다. 즉, 수탉은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시간을 다스리고 새벽을 여는 통치자적 존재다.
<절망의 늪을 날아 넘는 은유>
“절망의 늪을 새처럼 날아올라”는 구절은 희망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절망은 무겁고 끈적이며 인간을 잡아끄는 늪이지만, 새는 날갯짓으로 이를 가볍게 벗어난다. 이 장면은 단순히 현실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비상(飛翔)의 초월이다.
여기서 수탉은 단순히 땅을 긁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게 하늘로의 길을 열어주는 매개자다.
이는 곧 희망이란 절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날아 넘는 도약임을 보여준다.
<반복구조의 리듬과 각성의 의식>
“꼭 깨라 꼭 깨라 꼭 깨요~”라는 반복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다. 이 리듬은 민속의 굿판과도 닮았다. 굿에서 북과 장단이 반복되며 무의식을 깨우듯, 이 시의 반복적 외침은 독자의 정신을 흔든다.
문학은 종종 의미로만 읽히지만, 여기서는 소리와 리듬이 곧 메시지다.
이 반복은 독자를 읽는 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끌어들인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각성의 의식(儀式)으로 기능하였다.
<새벽과 시의 윤리학>
새벽은 하루의 시작이자, 삶의 재창조를 상징한다.
수탉의 울음은 단순히 아침을 알리는 소리가 아니라, 인간이 다시 살아야 할 윤리적 순간을 가리킨다.
시인이 말하는 “또 다른 새벽을 열자”는 말은 개인의 하루를 여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자는 선언이다. 이 지점에서 시는 단순한 자연시가 아니라, 윤리적·역사적 선언문이 된다.
<적막 속의 울림>
수탉의 소리는 적막 속에 울려 퍼진다.
적막은 단순한 고요가 아니라 죽음, 침묵, 정지를 상징한다.
이 적막을 깨는 수탉의 울음은 곧 죽음에서 생명으로, 침묵에서 목소리로 건너가는 사건이다.
이 장면은 성서의 부활 장면과도 닮았다.
무덤 속 적막을 깨뜨리고 새벽의 빛이 스며들 듯, 수탉의 울음은 생명과 역사의 순환을 되살린다.
<희망의 바람, 사회적 함의>
마지막 구절 “희망의 새로운 바람이 분다”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이는 개인의 위로를 넘어, 사회적 희망의 선언이다. 고통의 시대, 침묵의 역사 속에서 문학은 수탉의 울음처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여기서 바람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역사의 바람, 혁명의 기운, 민중의 숨결이다.
시인은 수탉의 울음을 통해 집단적 부활의 상징을 남긴다.
<동양적 순환과 서구적 구원론의 융합>
이 작품의 특이점은 동양과 서양의 상징을 동시에 호출한다는 점이다. 12 간지라는 동양적 순환론과 “기름 부음”이라는 서구적 구원론이 결합한다.
이는 문화적 혼종이 아니라, 보편적 상징의 창조다.
결국 수탉은 동양에서는 우주의 질서를, 서양에서는 신의 계시를 대변한다.
시인은 이 둘을 결합하여, 인류 보편의 각성 언어를 빚어내었다.
<문학의 궁극적 소명과 깨어남>
〈수탉〉은 궁극적으로 깨어남의 시학이다.
잠에서 깨어남, 고통에서 벗어남, 절망을 넘어섬,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맞이함. 이 모든 단계는 “깨어남”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수렴된다.
문학은 종종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 불리지만, 이 작품은 현실을 단순히 반영하지 않는다.
그것은 잠든 의식을 깨우고 새로운 윤리적 삶으로 초대하는 경종이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한 농가의 풍경시가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일깨우는 선언문이 된다.
<결론>
이인애 시인의 〈수탉〉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자연과 문명을 교차시키며 희망의 새벽을 선언하는 작품이다.
수탉의 울음은 단순한 자연 현상을 넘어, 윤리적·사회적·우주적 각성을 상징한다.
이 시는 문학이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를 깨우는 힘임을 증명한다.
시인의 수탉의 울음은 인간의 내면을 깨우는
깨어남의 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