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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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오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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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영 시인
내 안에 오시어 나를 살리시네
세상에서 들숨 날숨 어수선할 때
하늘 한 한쿰 먹여주시네
내 안에 오시어 나를 깨우시네
세상살이 게으름이 하늘을 가릴 때
산만한 안개를 걷어주시네
내 안에 오시어 나를 이끄시네
세상바람에 비틀거리며 헤매일때 때
하늘빛 한줄기 길을 밝혀주시네
(후렴)
하늘 숨을 쉬어라 내가 먹여주리니
은혜 숨을 쉬어라 내가 다시 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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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서두 -- ‘내 안에 오시어’라는 반복의 힘>
“내 안에 오시어”라는 구절은 단순한 종교적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 공간을 향해 다가오는 초월자의 움직임, 즉 인간의 닫힌 심연이 열리고 새로운 존재가 들어오는 사건이다.
시적 화자는 외부의 위대한 힘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라기보다는, 안을 비워내고 맞이하는 주체다. 이 반복적 호명은 일종의 영혼의 문을 두드리는 기도이며, 또한 독자에게도 내적 응답을 촉구하는 소리다.
반복 속에서 시는 노래로 바뀌고, 노래 속에서 고백은 공동체적 체험이 된다.
<‘살리심’의 의미 ---생명을 넘어 영생으로>
첫 연의 핵심은 “나를 살리시네”이다.
‘살림’은 단순한 육신의 연장이 아니라, 죽음과 허무를 넘어서는 부활적 생명이다.
세상의 들숨과 날숨이 어수선하다는 말은 현대 사회의 소란과 불안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시인은 신의 숨, 곧 하늘의 호흡을 받아들임으로써 소란한 호흡에서 평온한 호흡으로 전환된다.
이때 살림은 단지 위안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로 이해된다.
이는 창세기의 ‘하나님의 생기’가 흙에 불어넣어 진 순간을 환기시키며, 동시에 요한복음의 ‘영생’을 암시한다.
<‘하늘 한 한쿰’ --- 언어의 한국성과 초월적 체험>
‘한 한쿰’이라는 표현은 서구 신학으로는 번역하기 어려운 한국적 정서의 언어다.
한 모금, 한 입, 한숨 같은 생활어 속에서 인간과 초월이 만난다.
시인이 신학적 개념을 딱딱하게 전하지 않고, ‘한 한쿰’이라는 소박한 표현으로 풀어낸 순간, 초월은 일상의 상 위에 내려온다. 이처럼 생활적 언어로 전환된 영성은 한국 종교시의 중요한 성취다.
초월은 멀리 있지 않고, 마치 어머니가 아이에게 밥 한 숟가락 떠먹여 주는 행위처럼 친근하게 다가온다.
<‘깨움’의 차원 --- 나태와 무지를 걷어내는 손길>
둘째 연은 살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깨움’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삶은 단순히 숨 쉬고 존재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존재는 곧 의식이며, 의식은 빛에 의해 깨어난다.
시에서 ‘게으름이 하늘을 가린다’는 구절은 단순한 생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시야를 막아버리는 무지를 상징한다. 게으름은 개인적 습관이 아니라 영혼을 덮는 장막이다.
그 장막을 걷어내는 행위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오시는 분의 개입이다. 이 ‘깨움’은 윤동주의 「자화상」에서 거울 앞의 각성과도 통하며, 동시에 불교의 깨달음 개념, 서양 철학의 ‘각성’ 개념과도 연결된다.
<안개의 이미지 --- 불투명성과 그 해소>
안개는 시적 상징으로서 강력하다.
그것은 시야를 가리고, 방향을 잃게 하며, 인간을 망설이게 만든다. 안갯속에서는 길도, 목적지도 분명치 않다. 시인은 세상살이를 ‘산만한 안개’로 비유함으로써, 혼탁한 일상과 영적 무지를 동시에 포착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안개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외부의 은총에 의해 걷힌다는 점이다. ‘걷어주시네’라는 수동적 표현은 은혜의 주체가 인간이 아님을 확인한다.
안개가 걷힐 때 비로소 삶의 풍경은 명료해지고, 영혼의 눈은 열린다.
<‘이끄심’의 절정 ---방황하는 인간과 길잡이>
셋째 연은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문제인 방황을 다룬다. “세상바람에 비틀거리며 헤맬 때”라는 표현은 인간의 연약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세상바람은 경제적 위기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의 풍랑일 수도 있다.
시인은 그 속에서 길을 잃은 자아를 보여주면서, 곧바로 “하늘빛 한줄기 길을 밝혀주시네”라고 노래한다.
이 장면은 시 전체의 클라이맥스로, 길 없는 곳에 길을 내시는 분, 방황 속에서 등불을 켜주시는 분의 모습을 증거 한다.
<한줄기 빛의 신비--계시적 상징>
“하늘빛 한줄기”는 신학적 계시의 상징이다. 성경에서 빛은 진리와 계시, 그리고 구원의 은유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시인은 ‘한줄기’라는 표현을 붙임으로써, 그 빛이 압도적이기보다 조심스럽게 주어지는 은총임을 드러낸다. 인간에게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광휘가 아니라, 한줄기라도 분명히 보이는 길이 필요하다. 이 절제된 빛의 형상은 시인의 겸손한 신앙 태도를 보여준다.
<반복의 미학 삼중 구조의 힘>
세 연에 걸쳐 반복되는 “내 안에 오시어”는 점층적 고조를 형성한다. 처음에는 살리고, 이어서는 깨우며, 마지막에는 이끄신다.
이는 인간 구원의 전 과정, 곧 생명 부여와 의식
각성과 삶의 인도라는 신학적 단계를 압축한 것이다.
반복은 단조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리듬과 확신을 만든다.
이 리듬은 시를 낭송하는 순간 찬송가처럼 울려 퍼지고, 독자는 참여자로 변모한다.
<후렴의 등장 공동체적 노래의 차원>
시의 마지막에 후렴이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후렴은 단순히 시의 구조적 장치가 아니라, 공동체적 낭송을 위한 장치다. “하늘 숨을 쉬어라”와 “은혜 숨을 쉬어라”는 명령형 어법으로 독자와 청중을 직접 부른다. 이는 개인적 기도의 차원을 넘어, 예배와 찬송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후렴 속에서 시는 더 이상 혼자만의 고백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신앙 고백이 된다.
<숨의 신학과 문학적 은유>
숨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행위다. 들숨과 날숨은 생존의 근본이자, 동시에 영성의 은유다.
고대 철학에서 ‘프네우마(pneuma)’는 영혼과 호흡을 동시에 뜻했다.
이 시에서 ‘하늘 숨’은 단순한 산소의 호흡이 아니라, 영혼의 호흡이다.
‘은혜 숨’은 인간적 호흡을 넘어, 신의 호흡에 동참하는 신비적 참여를 의미한다. 숨은 매 순간 이어지기에, 영성 또한 끊임없는 현재적 행위로 경험된다.
<언어의 직설성과 절제>
정순영 시의 힘은 꾸밈없는 언어에서 온다. ‘살리시네’, ‘깨우시네’, ‘이끄시네’는 짧고 단정한 진술이다.
이는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확신의 언어다.
시적 화자는 논쟁하지 않고 증언한다. 이 증언적 어투는 종교시의 고백적 성격을 강화하며, 동시에 독자에게 흔들림 없는 신앙적 담대함을 전달한다. 수식어를 최소화하고 직설을 선택함으로써 시는 오히려 더 강력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한국 종교시의 현대적 변주>
한국 종교시는 자주 교리적 선언에 머무르거나, 설교적 뉘앙스를 띠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경계를 넘어섰다. 생활어와 영적 체험이 결합하여 신학적 진술을 시적 언어로 변모시켰다.
“한 한쿰”, “안개”, “한줄기 빛” 같은 표현은 교리적 개념을 구체적 체험으로 바꾸어준다.
이는 종교시의 현대적 성취라 할 수 있으며, 개인 신앙의 언어가 문학적 감각 속에서 공적 고백으로 승화된 사례다.
<결론>
내 안의 초월, 우리 모두의 찬송
마지막으로, 이 시는 개인적 영성의 체험을 공동체적 찬송으로 끌어올린다. 반복과 후렴은 본질적으로 낭송과 합창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시는 책상 앞에서 조용히 읽히는 텍스트를 넘어, 예배당이나 기도 모임 속에서 울려 퍼질 수 있는 노래다. 정순영 시인은 내면의 은밀한 체험을 공적 고백으로 변모시켰고, 이를 통해 ‘내 안의 초월’이 ‘우리의 고백’으로 확장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시는 문학을 넘어 존재론적 진실을 증언하는 장르가 된다.
종교를 초월한 시인의 한줄기 빛으로 나아가는 영적 소망의 울림의 시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