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박성진 《김석인-백호와 진이, 달빛 아래서》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백호와 진이, 달빛 아래서〉


김석인 헌정 시


霜節의 밤, 술잔에 달이 들고

청초한 혼이 묻힌 골짜기 위로

백호의 노래가 바람을 타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 다 누었는다”

그 음성에 응하듯,

저편에서 가야금 한 줄이 울린다


그대는 붉은 치맛자락으로

세속의 울타리를 넘었고

나는 붓 한 자루로

권력의 담을 허물었다


만난 적은 없으되,

우리의 혼은 이미

詩의 강에서 마주 앉아

서로의 그림자를 마신다


황진이여,

그대의 눈빛은 아직도 개성의 달빛 아래 있고

임제여,

그대의 시혼은 한양의 주막에 머문다


세상은 우리를 파직이라 부르고

풍류라 부르지만

사실은,

한 줄의 시로 살아남은

영혼의 연인들이었노라


오늘도 달빛은

청초한 무덤과 붉은 단풍 위를 흘러

두 이름을 잇는다


詩와 술, 그리고 사랑이여

그대들의 불멸이여.


**************

〈백호와 진이, 달빛 아래서〉


문화평론가 박성진



서론 — 달빛 아래에서 다시 만나는 두 혼의 자리


이 작품은 처음부터 아주 조용하게 문을 연다.

누구를 부르지도 않고, 무엇을 선언하지도 않는다.

그저 달빛이라는 부드럽고 투명한 길을 열어두고

백호 임제와 황진이라는 두 영혼이

그 위로 천천히 걸어오기를 기다리는 방식이다.

이 시가 특별한 이유는

“만난 적이 없음”을 오히려 핵심으로 삼는다는 점에 있다.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둘 사이를 멀게 하는 대신,

그 거리 속에서 서로의 기운이

더 은밀하게, 더 넓게, 더 깊게 공명한다.

김석인 시인은

두 인물을 역사적 사건으로서 다루지 않는다.

대신 두 사람의 기개,

그들이 지녔던 외로운 품격,

그리고 예술가에게서만 느껴지는

슬픔의 결을 꺼내

달빛 아래 조용히 놓아둔다.


그렇게 이 작품은

추모가 아니라 재회,

설명이 아니라 호명,

기록이 아니라 관계의 복원이 된다.



<‘霜節’이라는 단어가 여는 차갑고도 깊은 시간>


‘霜節’이라는 말은 음운부터 차갑다.

하지만 이 차가움은 단절의 차가움이 아니라

모든 소리가 가라앉아

오직 영혼만이 마주하는 시간이 열릴 때의 고요다.


서릿발 선 밤,

그곳에 술잔이 놓이고

달빛이 내려앉는다.


이 장면은 얼음 같은 침묵 속에서

영혼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달빛이 술잔 위에 닿는 순간,

이제 이 시는

현실의 소음을 덮고

문학의 시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 빛 아래에서

죽은 이와 산 이,

옛 인물과 오늘의 시인,

모든 존재의 결이 하나로 흐른다.

이곳은

“말의 세계”가 아니라

“기운의 세계”다.



< 백호의 한 줄과 황진이의 한 줄음, 소리로 만나는 두 혼>


백호 임제의 명구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 다 누었는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운명 같은 문장이다.

죽은 자의 고요와 살아 있는 자의 비애가

한 번에 닿는 음조를 지니고 있다.

그 음성에

황진이의 가야금 한 줄이 응답한다.

이것은 시적 장치가 아니다.

예술가끼리만 들을 수 있는 내면적 울림이다.

만난 적이 없으나

한 사람의 울음은

다른 사람의 혼에서 떨림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연대다.

이것이 바로 시대를 넘어 이어지는

문학의 기묘한 혈연이다.


가야금의 음색에는

황진이의 사랑·격정·비애·자존의 시간이 모두 들어 있고,

백호의 시음에는

그의 풍류, 분노,

외로움, 기백이 숨 쉬고 있다.

이 두 소리가 한 밤에,

달빛 아래에서 서로를 향해 간다.

소리는 시간보다 오래 살고

침묵보다 멀리 여행하기에

둘은 결국 이 한밤의 골짜기에서 만난다.



< 붉은 치맛자락과 붓 한 자루, 서로 다른 저항의 방식>


황진이는 몸으로 저항한 사람이다.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했고,

붉은 치맛자락 하나로

시대가 요구한 틀을 깨뜨렸다.

그 붉음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자존의 빛, 생의 결,

자신의 영혼을 버리지 않는 기품이다.

반면 백호는

“글”이라는 무기를 들었다.

그의 붓은 권력을 향한 침묵의 칼이었다.

신분의 틀을 총명하게 넘고

기득과 체면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둘은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본질은 같다.

한쪽은 몸짓으로,

한쪽은 문장으로

세상이 정해놓은 벽을 넘었다.

이 지점에서

두 영혼은 완전히 하나가 된다.

시인은 바로 그 닮음을

아주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잡아낸다.



<‘詩의 강’이라는 장대한 은유>


“詩의 강에서 마주 앉아 / 서로의 그림자를 마신다.”

이 구절은

이 작품 전체를 지탱하는 척추이자 심장이다.

시인은 연인이라는 단어를

육체의 관계로 쓰지 않는다.

대신 영혼의 결, 예술의 결,

서로의 슬픔과 기개를 알아보는 존재를 뜻한다.

그림자를 마신다는 말은

상대의 고독을 끌어안고

자기 내부로 받아들인다,

즉 내면의 연대를 의미한다.

詩의 강은

두 사람의 생애,

두 사람이 견디고 토해낸 외로움,

그리고 둘이 남긴 언어가

흐르고 흐른 끝에 하나가 되는 지점이다.

문학은 주막과 기생집의 먼지를 털어내고

둘의 영혼을 같은 자리로 데려온다.

그것은 역사보다 더 깊고

사실보다 더 아름다운 결합이다.



< 개성과 한양, 두 다른 빛이 달빛 아래에서 하나가 되다>


황진이는 개성의 달빛을 입은 사람이다.

그 달빛은 우아하지만

늘 슬픔을 밑에 깔고 있다.

임제는 주막의 등불 아래 살았다.

그 등불은 흔들렸고

인간 냄새가 진하게 스며 있었다.

달빛과 등불,

서늘함과 따뜻함,

고고함과 풍류.

서로 다르지만

두 빛이 닿는 곳은 결국 같다.

바로 인간의 마음,

그리고 예술의 자리다.

시인은 이 두 빛의 결을

달빛이라는 하나의 환한 그릇에 담는다.

달빛 아래에서

둘의 외로움과 기개는

서로의 얼굴을 알아본다.


< 세속의 이름이 아닌, 문학의 진실로 남다>


세상은 둘에게

기녀, 풍류객, 파직공 같은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 속에는

비웃음과 오해, 편견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러나 시인은 말한다.

“한 줄의 시로 살아남은 영혼의 연인들이었노라.”

이 한 문장으로

둘의 생애는 완전히 다른 빛을 얻는다.

여기서 연인은

운명적 동지,

예술적 공명자,

서로의 그림자를 기억하는 이들이다.

세속의 이름은 잊히지만

문학의 이름은 오래 남는다.

시인은 바로 그 이름을 다시 불러낸다.



< 달빛은 무덤과 단풍을 잇는 조용한 다리>


이 시의 마지막 풍경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장면이 아니다.

청초한 무덤의 흰빛과

붉은 단풍의 따뜻한 빛을

하나의 선으로 잇는 존재는

바로 ‘달빛’이다.

달빛은 말을 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그저 두 영혼 위를 지나간다.

그 지나감 자체가

만남이 되고,

화해가 되고,

예술의 완성이 된다.

달빛 아래서

백호와 황진이는

더 이상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시인은 이 장면으로

모든 감정의 흐름을 조용히 종결한다.



총평 — 문학이 잇는 인연은 죽음보다 길고, 세상보다 깊다


〈백호와 진이, 달빛 아래서〉는

한국문학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영혼의 재회 장면을 그린다.

이 작품은

역사의 기록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역사가 놓친 것,

즉 혼의 결,

슬픔의 음색,

예술가 특유의 고독과 기개를 되살린다. 만나지 않았던 두 사람이

시 속에서 비로소 서로를 향할 때,

그 조용한 움직임이

문학의 마법처럼 느껴진다.

김석인 시인은

두 영혼의 결을 잡아

달빛 위에 살며시 얹어둔다.

그 빛은 오래도록 남아

오늘의 독자에게도

잔잔한 울림을 남긴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아주 단순하다.


문학이 잇는 인연은 만남보다 오래 살고,

죽음보다 강하며, 세속의 말보다 더 정직하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박성진 《박진우 시인-고요도 연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