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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박진우 시인-고요도 연주다》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고요도 연주다〉


박진우 시인


한 귀는 바람에 맡기고

또 한 귀는 세상의 고요를

듣는다


베토벤이 가야금을 뜯는다

그 손끝에서 서양의 폭풍이

동양의 강물 위로

눈물 같은 화음이 내려앉는다


바람은 장단을 잃고 춤추며

뒹구는 낙엽 하나 악보

되어 흩날린다

파도는 모래 위에 쉼표를

새기지 못하고

바다의 심장을 두드린다


시간은 하루의 현을

팽팽히 조이지만

음계를 맞추는 사이

한 줄은 젊음이 끊어지고

한 줄은 슬픔이 울어간다

사라지는 틈새에 노을이

피어나고 저문 햇살이

마음의 먼지를 쓸어내린다


오늘도 내 안의 현 하나가

뚝 끊어지며 속삭인다

"고요도 연주다"

라고.




〈고요도 연주다〉


문화평론가 박성진


서론 — 침묵을 듣는 시, 존재를 울리는 시


〈고요도 연주다〉는 ‘소리가 없는 소리’를 다룬다.

보통 우리는 음악을 청각으로만 이해하지만, 이 시는 청각을 넘어 존재의 깊은 층위에서 울리는 음악을 다룬다.

바람을 듣고, 고요를 듣는다는 것은 단순한 청각적 행위가 아니라,

삶의 결을 세밀하게 만져보는 엄숙한 사유의 행위다.

고요를 듣는다는 것은 곧 자기 존재를 듣는 일이다.

시인은 그 귀를 이미 갖추고 있다.


베토벤이 가야금을 뜯는다 — 동서가 만나는 순간의 울림


베토벤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음악사적·철학적 충격을 가진 비유다.

베토벤은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었던 작곡가다.

청력을 잃고도 교향곡을 완성한 그의 삶은

고요 속에서도 음악이 살아 숨 쉰다는 진실을 증명한다.

그 베토벤이 동양의 여백을 상징하는 가야금을 뜯는다.

서양의 폭풍과 동양의 고요한 강물은

서로를 지우지 않고, 서로를 보듬으며,

마침내 눈물 같은 화음으로 내려앉는다.

이 장면은 단지 상상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문화가 만나는 순간이자, 철학이 음악으로 번역되는 순간이다.


자연의 악보, 바람, 낙엽, 파도


바람은 장단을 잃고,

낙엽은 악보가 되고,

파도는 쉼표를 새기지 못한다.

이 장면들은 시인이 자연을 보는 방식이 단순 묘사가 아니라

‘자연 안에서 울리는 음악적 리듬’을 감지하는 고도의 감성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삶이 내 뜻대로 울리지 않는 순간들을

실패나 혼란으로 받아들이지만,

자연의 음악은 우리에게 말한다.

울리지 않는 순간도 음악이다.

장단을 잃어도 춤은 계속된다.

쉼표를 놓쳐도 파도는 다시 치고 들어온다.


시간의 현, 젊음과 슬픔이 끊어지는 소리


시간을 ‘현’으로 비유한 시인의 감각은 빼어나다.

하루라는 현은 늘 긴장된 채 우리를 붙잡고,

그 긴장 속에서 젊음은 쉽게 끊어지고

슬픔은 오래도록 울린다.

그러나 시인은 그 끊어짐을 재난으로 보지 않는다.

끊어지는 현 사이로 노을이 피어난다.

즉, 상실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빛이 스며드는 틈이다.


노을과 햇살, 저무는 순간에 깃드는 위로


저문 햇살이 마음의 먼지를 쓸어낸다는 구절은

이 시의 가장 부드러운 숨결이다.

상실 뒤에 찾아오는 조용한 회복,

그 회복의 순간을 인간은 종종 놓치고 지나간다.

그러나 시인은 말한다.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의 먼지가 털리는 순간이다.


내면의 현이 끊어지는 순간 — 인간의 본질적 고독


“내 안의 현 하나가 뚝 끊어진다.”

이것은 누구나 하루에 몇 번씩 겪는 일이다.

숨이 무너지는 순간, 기대가 꺾이는 순간,

마음이 갑자기 아래로 꺼지는 순간.

그때 들리는 작은 속삭임.

그것이 바로 “고요도 연주다.”

시인은 이 속삭임을 두려움이 아니라

성숙의 증거로 읽는다.

끊어짐 속에서 새로운 음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음악과 철학이 만나는 더 깊은 층위


고요는 음악의 조건이 된다.


모든 음악은 쉼표를 갖고 있다.

쉼표가 없다면 음악은 호흡을 잃는다.

고요가 없다면 곡선은 생명을 잃는다.

이 시는 쉼표의 본질을 바로 ‘삶의 고요’로 해석한다.

쉼표는 소리가 멈춘 자리가 아니다.

소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여백이다.

고요는 침묵이 아니라

음악이 자기 자신과 만나는 숨의 자리다.


동양의 여백과 서양의 밀도의

화려한 만남


가야금은 여백의 악기다.

베토벤은 밀도의 작곡가다.

이 둘을 연결해 낸 시인의 상상력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 음악 미학의 핵심을 통합하였다.


동양의 여백은 침묵의 미학이고,

서양의 화성은 충만의 미학이다.

이 시에서 두 미학은 충돌하지 않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준다.

박진우 시인은 말한다.

"완전한 음악은 소리와 고요의 합주이다."


삶의 고요는 도망이 아니라 귀환이다


우리는 종종 고요를 ‘세상에서 물러남’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진짜 고요는 물러남이 아니라 귀향이다.

온갖 소음 속에서

당신이 진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이 시가 말하는 ‘고요’다.

고요를 듣는다고 해서

삶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중심으로 한층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결론 — 마지막 문장이 남긴 존재의 울림


“고요도 연주다.”


이 문장은 단지 시의 끝이 아니다.

삶의 수많은 해석을 하나로 묶어주는 마침표다.

우리는 소리 속에서 살지만,

고요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만난다.

소리는 흔적을 남기고,

고요는 의미를 남긴다.

그 고요 속에서

우리는 다시 연주를 시작한다.

박진우 시인의 시는 말한다.

《고요는 끝이 아니다.

또 하나의 시작이다.》

*새로운 경험,

새롭게 깨어난 순간을 포착한 시인의 고백 속에 끝이 아닌

"새롭게 다가오는 시인의 연주"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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