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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이인애 시인-해학과 반전》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해학과 반전〉


다정 이인애


혼돈이 들끓는 세상,

소리가 먼저 치솟고

말은 부풀다 허공에 흩어지지만

고요가 스치는 순간

살아나는 진실이 있다.


흩어져 무너진 이름을

먼지 털 듯 다시 세우고,

눈앞을 흐리던 장막을 젖히는 동안

혼탁한 마음 한쪽에

은근한 온기가 번진다.

정곡을 찔러 놓고도

슬며시 미소만 남기는 얼굴처럼.


시야가 막힌 그늘에 서면

큰 소리보다 작은 불빛을 찾는다.

세상의 허세를 바라보다 보면

해학의 칼끝은 남을 겨누기보다

나를 먼저 비추는 詩情이라는 거울.


*************


문화평론가 박성진


다정 이인애의 이 작품은 소란한 시대의 풍경을 한순간 안으로 접어 깊은 고요에 안착시키는 시적 전환을 보여준다.

시작부터 들끓는 혼란을 묘사하지만, 시의 목적은 그 혼란을 비난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혼란을 통과해 고요라는 다른 층위로 이끌어가는 데 있다.

소리와 말이 넘쳐나는 시대는 언뜻 활력이 있어 보이지만, 많은 경우 그 안에는 비어 있는 언어와 과장된 감정만이 흐른다.

시인은 이 흐름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그 속에서 진실의 수면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내면의 힘을 탐구한다.


고요가 스치는 순간에 진실이 살아난다는 진술은 작품 전체를 지탱하는 중심축이다. 해학을 흔히 떠들고 웃기는 장르로 오해하기 쉽지만, 이 시는 그 반대의 방향을 제시한다. 해학이야말로 조용함 속에서 빛을 띠고, 웃음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부드럽게 알려준다.

말이 지닌 허풍과 소리가 지닌 과열과는 달리, 해학은 절제와 숨결 속에서 더 선명해진다.


전체 흐름에서 시적인 아름다움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무너진 이름을 다시 세우는 장면이다.

세상은 사람의 이름을 무너뜨리는 데는 빠르고, 회복시키는 데는 유독 인색하다. 그러나 이 시는 먼지를 털어내듯 부드럽게 이름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장막을 젖히는 행위 또한 상징적이다. 흐려진 마음과 세상의 허위가 걷히고 나면, 그 아래엔 늘 어떤 온기가 흐르고 있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해학이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이해와 회복의 정서까지 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정곡을 찌르면서도 미소를 남긴다는 표현은 해학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

해학은 남을 쓰러뜨리는 칼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 가장 깊은 자리까지 도달한 뒤에도 상처보다 온기를 남길 수 있는 미묘한 기술이다. 이 미소는 가벼운 웃음이 아니다. 인간의 현실을 정확히 보되, 그 현실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따뜻함을 잃지 않는 마음이다.


시의 끝부분에서 시인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해학의 칼끝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을 향해 웃음의 화살을 쏘지만, 이 작품은 정반대의 윤리를 제안한다. 타인에게 겨누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겨눌 것. 자신의 허세를 보고, 자신의 그늘을 보고, 자신의 어둠을 먼저 들여다볼 것.

이 태도야말로 해학이 타락하지 않게 만드는 내적 원칙이다. 해학이 남을 비웃는 기술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순간, 그것은 조롱이 아니라 성찰이 된다.


작품의 마지막 구절에서 해학은 詩情이라는 거울로 규정된다. 이 거울은 왜곡되지 않는다. 시적인 감수성이란 인간을 부드럽게 비추는 빛이며, 거기에는 가감 없는 얼굴이 나타난다.

이 얼굴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얼굴이 아니라, 자기에게만 정직하게 드러나는 얼굴이다.

해학은 바로 그 정직함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전체적으로 이 시는 속삭임에 가깝다.

큰 목소리 대신 작은 불빛을, 비웃음 대신 미소를, 소란 대신 고요를 선택한다.

이 선택들이 모여 시 전체를 하나의 품격 있는 사유로 이끈다.

현실의 혼탁함을 정면으로 마주하되 그 안에서 따뜻한 온기를 놓치지 않는 태도, 이것이 이 작품이 독자에게 남기는 가장 깊은 울림이다.

해학은 결국 인간을 웃기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인간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한 창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강렬하면서도 조용함으로 증명하고 있다.

거울 앞에서의 조용한 반전의 미를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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