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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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과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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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 이인애
혼돈이 들끓는 세상,
소리가 먼저 치솟고
말은 부풀다 허공에 흩어지지만
고요가 스치는 순간
살아나는 진실이 있다.
흩어져 무너진 이름을
먼지 털 듯 다시 세우고,
눈앞을 흐리던 장막을 젖히는 동안
혼탁한 마음 한쪽에
은근한 온기가 번진다.
정곡을 찔러 놓고도
슬며시 미소만 남기는 얼굴처럼.
시야가 막힌 그늘에 서면
큰 소리보다 작은 불빛을 찾는다.
세상의 허세를 바라보다 보면
해학의 칼끝은 남을 겨누기보다
나를 먼저 비추는 詩情이라는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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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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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 이인애의 이 작품은 소란한 시대의 풍경을 한순간 안으로 접어 깊은 고요에 안착시키는 시적 전환을 보여준다.
시작부터 들끓는 혼란을 묘사하지만, 시의 목적은 그 혼란을 비난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혼란을 통과해 고요라는 다른 층위로 이끌어가는 데 있다.
소리와 말이 넘쳐나는 시대는 언뜻 활력이 있어 보이지만, 많은 경우 그 안에는 비어 있는 언어와 과장된 감정만이 흐른다.
시인은 이 흐름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그 속에서 진실의 수면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내면의 힘을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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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가 스치는 순간에 진실이 살아난다는 진술은 작품 전체를 지탱하는 중심축이다. 해학을 흔히 떠들고 웃기는 장르로 오해하기 쉽지만, 이 시는 그 반대의 방향을 제시한다. 해학이야말로 조용함 속에서 빛을 띠고, 웃음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부드럽게 알려준다.
말이 지닌 허풍과 소리가 지닌 과열과는 달리, 해학은 절제와 숨결 속에서 더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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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흐름에서 시적인 아름다움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무너진 이름을 다시 세우는 장면이다.
세상은 사람의 이름을 무너뜨리는 데는 빠르고, 회복시키는 데는 유독 인색하다. 그러나 이 시는 먼지를 털어내듯 부드럽게 이름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장막을 젖히는 행위 또한 상징적이다. 흐려진 마음과 세상의 허위가 걷히고 나면, 그 아래엔 늘 어떤 온기가 흐르고 있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해학이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이해와 회복의 정서까지 품을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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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곡을 찌르면서도 미소를 남긴다는 표현은 해학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
해학은 남을 쓰러뜨리는 칼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 가장 깊은 자리까지 도달한 뒤에도 상처보다 온기를 남길 수 있는 미묘한 기술이다. 이 미소는 가벼운 웃음이 아니다. 인간의 현실을 정확히 보되, 그 현실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따뜻함을 잃지 않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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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끝부분에서 시인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해학의 칼끝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을 향해 웃음의 화살을 쏘지만, 이 작품은 정반대의 윤리를 제안한다. 타인에게 겨누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겨눌 것. 자신의 허세를 보고, 자신의 그늘을 보고, 자신의 어둠을 먼저 들여다볼 것.
이 태도야말로 해학이 타락하지 않게 만드는 내적 원칙이다. 해학이 남을 비웃는 기술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순간, 그것은 조롱이 아니라 성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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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마지막 구절에서 해학은 詩情이라는 거울로 규정된다. 이 거울은 왜곡되지 않는다. 시적인 감수성이란 인간을 부드럽게 비추는 빛이며, 거기에는 가감 없는 얼굴이 나타난다.
이 얼굴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얼굴이 아니라, 자기에게만 정직하게 드러나는 얼굴이다.
해학은 바로 그 정직함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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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이 시는 속삭임에 가깝다.
큰 목소리 대신 작은 불빛을, 비웃음 대신 미소를, 소란 대신 고요를 선택한다.
이 선택들이 모여 시 전체를 하나의 품격 있는 사유로 이끈다.
현실의 혼탁함을 정면으로 마주하되 그 안에서 따뜻한 온기를 놓치지 않는 태도, 이것이 이 작품이 독자에게 남기는 가장 깊은 울림이다.
해학은 결국 인간을 웃기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인간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한 창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강렬하면서도 조용함으로 증명하고 있다.
거울 앞에서의 조용한 반전의 미를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