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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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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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김민정 시조
하늘의 벅찬 숨결 그대로
땅이 받아 홀로 된
꽃대궁도 꽃씨를
받아둔다
순간은 모두 꽃이다
네 남루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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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시조 〈꽃, 그 순간〉을 읽는 순간,
독자는 마치 아주 오래된 사찰의 마당이나
고요한 들녘에서 한 송이 꽃을 올려다보는 듯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짧은 시조 형식 안에 담긴 언어의 결은 단단하고,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생명과 시간의 빛은 부드럽다.
이 작품은 화려함을 피하면서도 말의 온도를 살리고,
자연에서 건져 올린 가장 단순한 진실을
한 편의 시적 순간으로 응축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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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구절의 “하늘의 벅찬 숨결”은
단지 자연 묘사의 수준을 넘어서
천지의 숨이 인간과 생명에게 어떻게 전해지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우리 문학 전통에서 하늘은 늘 ‘숨’으로 존재했다.
보이지 않지만 모든 생명을 일으키는 바탕.
그 숨을 땅이 받아 생명이 태어난다는 구조는
동아시아 자연철학의 가장 중심에 놓인 사유이며,
시조가 원래 지니고 있던 고유한 자연관을 다시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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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주목한 것은 꽃의 절정이 아니라,
꽃이 진 뒤 남은 부분인 “홀로 된 꽃대궁”이다.
모든 아름다움이 스러진 자리,
바람 앞에서 흔들리면서도 푸근히 제 자리를 지키는 그 대궁은
눈에 띄지 않지만 생명을 다음으로 넘겨주는 핵심이다.
시조는 언제나 물화의 본질, 즉 사소해 보이는 자리에서
가장 깊은 의미를 끌어내는 데 섬세했다.
김민정 시조는 이 오래된 시조의 시선을 현대적으로 잇는다.
꽃이 떨어져도 대궁은 씨앗을 품고,
그 씨가 다시 시간을 건너 생명을 부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늘지만 단단한 언어로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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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다.
생명의 반복과 윤회, 시간의 연속성과 단절,
그리고 성숙이라는 고전적 주제가
아무런 과장 없이 담겨 있다.
시인이 그리는 자연은 결코 장식적이지 않다.
땅 위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존재들을 바라보며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자연철학’을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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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가장 깊게 다가오는 정점은 역시 마지막 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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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은 모두 꽃이다. 네 남루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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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시조의 가장 깊은 미학,
즉 넓게 품어 안는 마음을 간결한 문장으로 되살린다.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이지만,
시인은 ‘순간’이라는 시간의 틀을 꽃으로 확장한다.
그 순간이 기쁘든, 고단하든,
남루하든, 화려하든 모두 꽃처럼 빛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상처나 실패까지도 포옹하는 시조 특유의 너그러움이며,
한국 문학이 오래도록 간직해 온 깊은 정서다.
남루한 순간조차 꽃으로 대접하는 시인의 시선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존엄한 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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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라는 형식은 본래 짧지만,
짧음이 오히려 더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된다.
세 세트의 구절 속에서
자연, 인간, 순간, 존재, 생명, 시간까지 모두 포착해 내는 이 작품은
시조의 압축 미학을 정확하게 구현한다.
짧기 때문에 더 맑아지고,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더 깊어진다.
김민정 시조는 그 힘을 정확하게 알고
한 줄 한 줄에 의미의 숨을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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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그 순간〉은
한국 시조가 단지 ‘전통 시가’가 아니라
오늘의 언어와 감각 속에서도 강력히 살아 있는 형식임을 보여준다.
자연을 통해 존재의 바닥을 들여다보고,
짧은 호흡 안에 인간의 시간을 담아내며,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자비의 결을 남긴다.
이것은 한국 시조가 지닌 위력의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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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시조의 미래를 밝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통의 형식을 지키면서도
현대의 감각과 언어로 재해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생명과 자연, 인간의 순간에 대한 사유를 통해
한국 시조가 세계적 문학 가치로 나아갈 수 있음을 환하게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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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꽃, 그 순간〉은
단순한 자연시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경외, 존재에 대한 존중,
그리고 시간의 모든 결까지도 꽃으로 바라보는
깊은 인간학의 기록이다.
짧은 문장 안에
세계와 인간의 진실을 품어내는 한국 시조의 힘을 가장 온전한 결로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