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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유숙희-목화의 추억-벙어리 목화솜 장갑》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목화의 추억


벙어리 목화솜 장갑



유숙희 시인


매서운 추위에도

얼음판 위 팽이는

때려야 사는 운명


길게 늘어진 끈 양끝엔

벙어리장갑이 매달려

응원하듯 흔들리고,


정오가 지나자 밥 먹으라

부르는 소리에, 그때서야

팽이치기 불편했던

벙어리장갑을 끼며

손가락장갑 끼고 싶다고

떼를 쓸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미 엄만 못 입는

스웨터를 풀어 손가락장갑

뜨고 계셨고, 불편하지만

따뜻하고 가벼운 목화솜

벙어리장갑을 사랑했다



이 시를 읽으면, 온몸으로 겨울바람이 스쳐 지나가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따뜻해집니다.

얼음판, 팽이, 끈에 매달린 장갑, 정오 무렵 밥 먹으라는 소리, 방 안에서 스웨터를 풀어 장갑을 뜨는 엄마의 손까지.

짧은 시 안에 그 시절 겨울 한 날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말은 역시 ‘벙어리장갑’입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장갑, 입은 없지만 손을 품어 주는 존재.

크게 떠들지 않고, 조용히, 대신 얼음판 위에서 노는 아이의 손을 지켜주는 역할만 묵묵히 해 주지요.

그래서 이 장갑은 단순한 방한용 소품이 아니라, 말없이 사랑을 건네는 상징처럼 느껴집니다.


“팽이는 때려야 사는 운명”이라는 구절도 인상적입니다.

아이들의 놀이라는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삶에 대한 느낌이 스며 있습니다.

팽이는 맞아야 돌고, 채여야 중심을 잡습니다.

사람의 삶도 어쩌면 그렇다는 생각이 스며 있지요.

차가운 얼음판 위에서 부딪치면서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존재, 그게 팽이이면서 동시에 사람입니다.


장갑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마음으로 옮겨갑니다.

팽이치기를 할 때 벙어리장갑이 불편했다는 고백,

그래서 손가락장갑을 끼고 싶었던 마음이 솔직하게 드러납니다.

이 대목이 참 좋습니다.

가난한 시절의 정서를 미화하거나 감추지 않고,

아이로서 느꼈던 불편함과 욕심을 가감 없이 꺼내놓기 때문입니다.

그 솔직함 때문에 시가 더 살아납니다.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장면,

못 입는 스웨터를 풀어 손가락장갑을 뜨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낡은 옷 하나를 끝까지 아끼는 풍경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아이를 위해 시간과 손놀림을 들이는 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스웨터의 실이 풀려 새로운 장갑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그 실타래는 단순한 옷감이 아니라 사랑의 선으로 느껴집니다.


여기서 ‘목화솜’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목화솜 장갑은 당시의 생활 현실을 보여주는 소재이기도 하지요.

두껍고 투박하고, 손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이기에는 불편하지만,

그 대신 정말 따뜻합니다.


시인은 그 불편함과 따뜻함을 함께 기억합니다.

마지막 행에서

“불편하지만

따뜻하고 가벼운 목화솜

벙어리장갑을 사랑했다”

라고 고백하는 순간, 시 전체의 정조가 또렷이 드러납니다.

편리해서가 아니라,

예뻐서가 아니라,

거기에 엄마의 손길과 그 시절의 숨결이 스며 있었기 때문에

그 장갑을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의 매력은 감정을 과장하거나,

억지로 눈물을 끌어내려고 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저 그때 있었던 일, 그때의 생각, 그때의 풍경을

담담하게 꺼내놓을 뿐인데

읽는 사람 마음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울림이 생깁니다.

장갑 하나를 통해 시인은 그 시대의 겨울,

가난하지만 서로를 위해 손을 놀리던 어른들,

불편함과 따뜻함을 함께 배웠던 어린 날의 자신을 다시 마주합니다.

그래서 이 시는 단지 옛이야기를 늘어놓는 회상 시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묻는 시가 됩니다.


말은 없지만 따뜻한 장갑 같은 마음을

우리는 여전히 품고 있는가.

누군가의 손을 위해 내 시간을 풀어쓸 준비가 되어 있는가.

조용하고 소박하지만,

읽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오래도록 따뜻해지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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