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박성진 《시인 유응교-마이산》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마이산

시인 유응교


음양의 발원지로 하늘땅 열리는 곳

부부가 마주 보며 승천의 꿈 간직한 채

평생을 등 굽은 아내 곁에 앉아 지키네


억만 년 태극으로 휘돌아 나가면서

이승의 하늘 멀리 구름을 풀어놓고

말 못 할 깊은 사연을 애틋하게 전하네


사랑은 마주 보며 눈빛으로 말을 하고

오로지 귀를 세워 들어주는 일이라고

오늘도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앉았네




마주 봄의 윤리, 한국적 사랑의 원형


이 시는 마이산을 노래하지만, 풍경의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마주 선 두 봉우리는 자연의 형상이기 이전에 관계의 상징이다. 서로를 향해 서 있으되 다가서지 않고, 말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견디는 존재들. 시인은 이 마주 봄을 ‘사랑의 윤리’로 끌어올린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배치이고, 정복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이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하게 설득한다.


자연이 품은 철학의 발원지


첫 연의 “음양의 발원지”라는 구절은 마이산을 단순한 명승이 아니라 세계관의 중심에 놓는다. 음과 양, 하늘과 땅, 남성과 여성, 움직임과 머묾이 갈라지기 이전의 자리. 이곳은 시작이자 회귀의 장소다. 한국적 자연관에서 산은 배경이 아니라 사유의 주체다. 시인은 이 오래된 인식을 다시 불러내어, 자연을 바라보는 일이 곧 삶을 성찰하는 일임을 조용히 환기한다.


부부의 형상으로 읽히는 산


“부부가 마주 보며”라는 표현에서 시는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넘는다. 산은 더 이상 무생물이 아니다. 함께 늙어가는 존재, 서로의 삶을 증언하는 관계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주 봄’이다. 붙어 있지 않기에 각자의 형상이 온전히 드러나고, 떨어져 있기에 존엄이 유지된다. 이는 한국적 부부관의 미덕, 곁에 있으되 침범하지 않는 사랑의 방식과 닮아 있다.


등 굽은 아내, 삶을 견디는 몸의 미학


이 시의 정서적 중심에는 “등 굽은 아내”가 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노동과 세월, 돌봄과 인내가 몸에 새긴 시간의 기록이다. 시인은 이 굽은 등을 연민이나 동정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곁에 “앉아 지킨다”는 태도로 응답한다. 지킨다는 말에는 보호보다 존중이 먼저 있다. 삶의 무게를 대신 들어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그 무게가 존엄임을 인정하는 자세다.


태극의 시간, 한국적 우주의 감각


둘째 연에서 마이산은 “억만 년 태극으로 휘돌아” 나간다. 여기서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회전이다. 시작과 끝이 구분되지 않는 한국적 우주관이 드러난다. 이 순환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사연은 작아지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의 큰 호흡 안에 포섭되며 깊이를 얻는다. 말 못 할 사연이 ‘애틋함’으로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하지 않음의 침묵의 언어


이 시는 반복해서 ‘말 없음’을 강조한다. 말 못 할 사연, 아무 말 없이 바라봄. 그러나 침묵은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신뢰 깊은 소통의 방식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고, 고백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이는 한국적 정서에서 오래도록 귀하게 여겨져 온 미덕이다. 시인은 이 침묵을 자연과 사랑, 그리고 삶의 언어로 격상시킨다.


듣는 사랑, 귀를 세운다는 것


마지막 연의 핵심은 “오로지 귀를 세워 들어주는 일”이다. 사랑을 말하는 대신 듣는 행위로 정의한 대목이다. 이는 관계의 권력 구조를 근본에서 바꾼다. 말하는 자가 중심이 되는 세계에서, 이 시는 듣는 자를 사랑의 중심에 둔다. 상대의 말뿐 아니라, 말하지 못한 시간과 숨결까지 들으려는 태도. 이것이 이 시가 제안하는 사랑의 완성형이다.


한국적 미의 품격


이 작품의 미덕은 과장하지 않는 데 있다. 장엄한 자연 앞에서도 시인은 목소리를 낮춘다. 서정은 절제되어 있고, 감정은 눌러 담겨 있다. 이는 한국적 미의 핵심, 드러내지 않음으로 더 깊어지는 아름다움과 맞닿아 있다. 화려한 수사 대신 배치와 여백으로 의미를 만드는 방식은, 산수화의 정신과도 통한다.


시인의 삶이 시가 되는 순간


이 시가 품격을 얻는 지점은, 대상에 대한 태도에서 시인의 삶이 읽히기 때문이다. 등 굽은 아내를 바라보는 시선, 마주 선 산을 해석하는 방식에는 삶을 오래 견뎌온 사람만의 윤리가 배어 있다. 자연을 빌려 자신의 철학을 말하되, 자신을 앞세우지 않는 겸손. 이것이 이 시가 단순한 풍경시를 넘어, 한 시인의 삶을 존중하게 만드는 이유다.


마주 보며 살아간다는 것


결국 이 시는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서 있는가. 그리고 누구와 마주 보고 있는가. 아무 말 없이도 서로를 지켜볼 수 있는 관계, 등 굽은 시간마저 사랑으로 남기는 삶. 마이산은 그 가능성을 오래도록 서서 보여준다. 이 시는 자연을 노래하면서, 한국적 사랑의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형태를 우리 앞에 놓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박성진 시인-삶은 우주이며 물음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