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화평론가
박성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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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김호운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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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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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몇 개의 얼굴이 있는지
차분히 세어보는 사람은 드물다.
대개 우리는 하나의 얼굴로 살아간다고 믿는다.
그러나 도시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여러 얼굴을 쓰며 살아간다.
웃는 얼굴, 침묵하는 얼굴로
옳은 말을 하는 얼굴,
그리고 끝내 드러내지 않는 얼굴까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파리에는 사람보다 얼굴이 더 많다”라고 썼다.
이 문장은 현대 도시의 풍경을 말하지만,
사실 그 시작은 훨씬 오래되었다.
고대 아테네 역시
사람의 수보다 얼굴이 많았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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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바로 그 얼굴들이 만들어낸 도시의 초상이다.
기원전 423년, 디오니소스 연극제에서
이 작품은 3등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 순위는 작품의 깊이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대 시민들이
이 희극을 얼마나 불편하게 받아들였는지를 말해준다.
농부 스트렙시아데스는
아들 페이디피데스의 방탕으로 인해
채권자들에게 시달린다.
이 설정은 웃음을 부르지만,
그 웃음 뒤에는
아테네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피로가 깔려 있다.
빚과 법정,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궤변,
정치라는 말속에 숨어 있는 계산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모든 것을 희극이라는 틀 안에 묶어
무대 위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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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자의 모습과 다르다.
그는 공중에 매달려 허공의 이치를 말하고,
제우스가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분명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웃음은 단순한 조롱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불안
전통이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는 감각,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불안을
소크라테스라는 인물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구름』이 겨누는 대상은
소크라테스 개인이 아니다.
이 희극의 핵심은
질문하는 사람을
불편해하는 사회다.
질문이 많아질수록
도시는 그 질문을 제거하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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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탄핵되고,
공개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는다.
희극이 끝난 자리에서
현실의 비극이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후를 알고 있다.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망하고,
스파르타의 과두정이 들어선다.
질문을 제거한 도시는
스스로를 지킬 힘을 잃는다.
이 고대 희극을
다시 읽게 만드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거리다.
웃음을 확대하지 않고,
교훈을 앞세우지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 떠 있는
‘구름’의 위치를
조금 낮추어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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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김호운 이사장의 소설적 접근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을
해석하지 않는다.
웃음을 소설로 옮기지도 않는다.
대신 희극 속에 흐르던
보이지 않는 공기,
말과 말 사이에 머물던 침묵을
소설의 호흡으로 건너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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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희극을 소설로 건너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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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너옴은
과장을 덜어내는 작업이다.
무대 위에서 크게 움직이던 인물들은
소설 속에서
조금 낮은 목소리를 갖는다.
그러나 그 낮아진 목소리 때문에
도시의 얼굴은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구름은 더 이상
하늘에만 떠 있지 않다.
광장 위에, 법정 안에,
시민들의 마음 사이에
낮게 떠 있다.
말은 넘치지만
책임은 모이지 않고,
모두가 옳은 말을 하지만
아무도 질문을 견디지 못하는 상태.
이것이 『구름』이 보여주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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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적 접근의 미덕은
판단하지 않는 데 있다.
누가 옳은지,
누가 잘못했는지를
작가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그 도시 한가운데에 서게 만든다.
그리고 묻게 한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도시는
질문을 환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불편해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고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여론이라는 이름의 구름,
이념이라는 이름의 구름,
말하지 않는 다수라는 구름은
시대를 바꾸어가며
늘 반복된다.
형태는 다르지만
작동 방식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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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구름』은
끝난 희극이 아니다.
그리고 이 희극을
소설로 건너오게 하는 작업 역시
과거를 복원하는 일이 아니라
현재를 바라보는 방식에 가깝다.
이 글이 도달하는 지점은 단순하다.
문학은
답을 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은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감각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랬고,
그 희극을 다시 건너온 소설 역시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구름은 오늘도 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름 아래에서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