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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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밝은 태양 - 『절규』 이후의 밝은 태양의 새해 2026년
박성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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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는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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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새해가 밝아온다.
우리는 흔히 에드바르 뭉크를 떠올릴 때 자동으로 절규를 호출한다.
뒤틀린 하늘, 벌어진 입, 세계의 균열, 그러나 그 그림은 결론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절규』는 뭉크가 세계를 향해 던진 최초의 질문이었고, 질문은 언제나 다음 장면을 요구한다.
고통을 말한 자는, 반드시 고통 너머를 통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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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도피가 아니라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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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 이후 뭉크가 그린 태양은 전혀 다른 음계로 울린다. 여기서 태양은 장식도, 위로도 아니다.
그것은 결단이다. 뭉크는 어둠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을 통과한 뒤에야 빛을 선택했다.
태양은 외부의 구원이 아니라 내부에서 길어 올린 의지다.
상처를 가진 자만이, 빛의 무게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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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서 질서로, 감정에서 구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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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의 세계가 감정의 폭발이었다면, 『태양』은 구조의 탄생이다. 방사형으로 퍼지는 빛, 중심을 향한 응집. 이것은 감정의 승화이며, 불안을 질서로 번역한 회화적 문장이다.
뭉크는 자신의 신경을 해부하듯 그렸던 화가에서, 세계의 리듬을 조직하는 작곡가로 이동한다.
공포는 여전히 남아 있으나, 그것은 더 이상 주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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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음은 낙관이 아니라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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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태양』을 “밝아진 뭉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밝음은 가벼움이 아니다. 빛은 어둠보다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한다.
어둠은 숨을 수 있지만, 빛은 드러나야 한다.
『태양』의 화면에는 도피의 흔적이 없다.
오히려 “이 세계를 다시 살아보겠다”는 윤리적 선언이 있다.
뭉크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고, 생을 다시 감당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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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 이후, 인간은 다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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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가 인간의 붕괴라면, 『태양』은 인간의 재기다. 울부짖은 뒤에 침묵이 오고, 침묵 뒤에 선택이 온다.
뭉크는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무너졌지만, 다시 그린다.”
이 태양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이 아니라,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선 인간의 등 뒤에서 떠오르는 빛이다.
그래서 이 태양은 밝다.
그리고 그 밝음은, 끝내 부끄럽지 않은
2026년 새해가 되기를 기도 한다.
박성진 |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