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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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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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영
(한국문인협회 회장 · 마포)
잘 생긴 바위 온몸 세상에
나투신 몸
석공 하나하나 깎아내니,
석공이 바위를 깎아내서가
아니라 이미
부처가 바위 속에 들어 있어서
미소 짓고 세상에 나오는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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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처에 대한 불교적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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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영 시인의 시 〈돌부처〉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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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영 시인의 사찰로 가는 길에서, 시는 이미 시작된다
깊은 사찰로 향하던 길이었다.
산중으로 들어설수록 말수는 줄고, 풍경은 낮아지며, 마음은 자연스레 안쪽으로 기울어지던 때였다. 그때 시인의 눈에 도로 옆 한 장면이 들어온다. 석공이 돌을 다듬고 있었고, 그 곁에는 이미 완성된 돌부처 하나가 조용히 세워져 있었다.
막 깎아내는 돌과, 이미 완성된 돌부처.
그 둘이 나란히 놓인 풍경 앞에서 시인은 멈추어 선다. 아직 다듬는 중인 돌보다, 오히려 이미 다 깎여 더 손댈 것이 없는 돌부처의 인자한 얼굴이 먼저 마음에 들어온다. 이 멈춤의 순간, 이 시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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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로 가는 길, 수행은 이미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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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중의 사찰은 언제나 목적지처럼 보이지만, 불교의 사유는 늘 그 이전에서 시작된다. 김하영 시인의 〈돌부처〉 역시 법당 안에서 태어난 시가 아니다. 이 시는 사찰로 향하는 도로 옆, 뜻밖의 장소에서 열린다. 수행은 경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 길 위에서 이미 시작된다는 사실을 시는 조용히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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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옆 석공, 세속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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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공은 특별한 종교적 인물이 아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돌을 다듬는 사람이다. 하루의 노동을 반복하는, 세속 한가운데의 인물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포착된 순간, 그의 손놀림은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다.
망치질은 규칙적이고 거칠지만, 그 앞에 놓인 대상은 점점 얼굴을 갖추어 간다. 세속의 손길이 성스러움과 맞닿는 지점, 바로 그 자리에서 이 시는 열린다. 불교적 깨달음은 늘 사찰의 중심이 아니라, 이렇게 삶의 가장자리에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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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긴 바위 온몸 세상에 나투신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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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첫 구절은 이미 불교적 세계관을 품고 있다. 바위는 단순한 무생물이 아니다. 이미 ‘나투신 몸’이다. 이는 어떤 비유나 과장이 아니라, 존재를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를 드러내는 문장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에 가깝다. 시인은 돌을 아직 의미 없는 물질로 보지 않는다. 이미 세상에 나올 준비를 마친 존재, 다만 잠시 안에 머물고 있을 뿐인 존재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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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냄은 창조가 아니라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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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 깎아내니”라는 구절은 행위의 반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반복은 무언가를 더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덜어내는 일이다.
불교에서 수행이란 욕망을 더 쌓는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덧붙여진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이다. 돌이 깎일수록 본래의 형상이 드러나듯, 사람 또한 불필요한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에 가까워진다. 이 시는 그 과정을 설명하지 않고, 돌의 형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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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공이 바위를 깎아서가 아니라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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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중심은 이 짧은 전환부에 있다. 시인은 단호하게 말한다. 석공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고. 이는 인간 중심적 창조관을 부드럽게 내려놓는 문장이다.
불교적 사유에서 진리는 인간의 능력으로 ‘제작’되지 않는다. 진리는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인간은 다만 그것을 발견하고 알아볼 뿐이다. 석공은 창조자가 아니라, 드러나게 돕는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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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속에 들어 있는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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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바위 속에 들어 있어서”라는 구절은 불교의 가장 평이하면서도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부처는 멀리 있지 않다. 어떤 특별한 장소에만 머무르지도 않는다.
바위 속에도, 길가에도, 도로 옆에도, 일상의 한복판에도 이미 존재한다. 다만 아직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아직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시인은 이 사실을 설명하지 않고, 선언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렇게 보고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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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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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처의 미소는 석공의 기술로 조각된 표정이 아니다. 그것은 드러나는 순간 자연히 나타나는 얼굴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평온은 억지로 만들어진 표정이 아니다.
걷어내고, 덜어내고, 더 이상 손댈 것이 없을 때 남는 얼굴. 시인은 이 미소를 통해 수행의 결과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행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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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세워진 돌부처, 다듬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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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본 장면에는 이미 완성된 돌부처 하나가 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석공은 여전히 징을 들어 돌을 쪼고 있다.
그 소리는 거칠고 세속적이지만, 시인의 귀에는 마치 법당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 순간, 돌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성스러움이 깃든 존재가 된다. 완성된 것과 미완의 것이 함께 놓인 자리에서, 시인은 삶의 한 장면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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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움은 장소가 아닌,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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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성스러워진 것은 그 자리가 사찰이어서가 아니다. 시인의 마음이 바뀌는 순간, 돌은 이미 성스러워진다.
불교적 사유에서 성스러움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 상태에서 비롯된다. 이 시는 사찰보다 도로를, 법당보다 일상을 먼저 보여주며, 인식의 전환이 어디서든 가능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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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음, 수행자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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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영 시인의 시적 화자는 설명하지 않는다. 설교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판단하지 않고, 꾸미지 않고,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다.
이 태도는 수행자의 마음과 닮아 있다. 시인은 돌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그 존재가 스스로 말하도록 기다린다. 이 기다림이야말로 이 시가 지닌 가장 깊은 불교적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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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처는 우리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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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처〉는 결국 하나의 돌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이 시는 말한다. 우리 또한 이미 바위 속에 부처를 품고 있는 존재라고.
삶이 우리를 깎아내는 고통과 상처는 파괴가 아니라, 어쩌면 본래의 얼굴이 드러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김하영 시인의 이 시는 독자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 안의 돌부처는, 지금 어디까지 보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