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전중호 시인-나는 지금 조용히 행복하다》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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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조용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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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호 시인,수필가,사진작가


겨울을 접어

배낭에 넣고

나는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국의 시간은

얼음처럼 단단했으나

이곳의 하루는

꽃이 먼저 말을 건넨다


계절표가 필요 없는 섬,

꽃과 햇살이

하루의 온도를 정하고

사람의 숨이

시간을 천천히 풀어놓는다


손녀는

맑은 물속에서

인어의 꼬리를 얻고

웃음 하나로

물결을 가른다


시간에 쫓기던 아들은

딸 쌍둥이 손을 붙잡고

일 대신 풀장으로 뛰어들며

비로소

아빠가 된다


며느리는

물속에서 반짝이는 두 딸과

널따란 남편의 등을 바라보며

그 오후의

온기를 놓지 않는다


아내는

일정표와 과제물 사이에 끼어 있던

긴 숨을 내려놓고

햇살 속에서

자기 이름을 다시 부른다


계절을 건너기만 했던 나,

여기서는

꽃 사진과

아내의 미소와

손녀의 물방울이

하루의 전부가 된다


오랜만에

시 한 줄이 나를 부르고

나는 그 부름에

기꺼이 늦어진다

천국은 아마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이

아무 말 없이

곁에 모여드는 곳인가 보다


덜 익었다며

두리안을 팔지 않는 사람들,

기다림을 아는 마음이

이 섬의 단맛이다


나는 지금

행복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조용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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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이미 삶의 상태가 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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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호 시인의 시의 제목은 선언이 아니라 현재형의 호흡이다.

‘나는 지금’이라는 말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고, 과거를 회상하지도 않는다.

‘조용히’라는 부사는 이 시의 윤리를 미리 규정한다.

이 시에서 행복은 말해질수록 옅어지는 감정이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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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이 아니라 시간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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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여행을 떠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겨울을 접어 배낭에 넣었다고 말할 뿐이다.

이는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시간의 태도를 바꾸는 행위다.

한국의 시간은 ‘얼음처럼 단단한’ 시간이었다.

효율과 성취, 속도와 결과로 굳어진 시간이다.

반면 이곳의 시간은 꽃이 먼저 말을 건다.

시간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자연으로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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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지는 시간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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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숨이 시간을 천천히 풀어놓는다”는 구절은

이 시의 중심 문장이다.

여기서 시간은 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풀어야 할 존재다.

숨은 가장 느린 리듬이며,

시인은 그 리듬에 세계를 맞춘다.

이 순간부터 시는 서사보다 체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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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의 웃음, 생의 시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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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의 장면에서 시간은 완전히 사라진다.

인어의 꼬리는 상상이지만,

그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웃음이다.

이 웃음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오직 지금만 있다.

이 시가 행복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첫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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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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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이미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는 말한다.

“비로소 아빠가 된다.”

이 문장은 역할이 아니라 존재의 전환을 말한다.

일을 멈추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아버지는 다시 관계 속으로 돌아온다.

이 시는 성취의 시간을 관계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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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는 사랑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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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바라본다.

그리고 온기를 놓지 않는다.

이 장면에는 감정의 과잉이 없다.

사랑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임을

시인은 조용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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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되찾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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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장면은 이 시의 가장 깊은 곳이다.

‘자기 이름을 다시 부른다’는 말은

한 사람의 존재가 회복되는 순간이다.

일정표와 과제물은 삶의 책임이지만,

그 사이에서 이름은 종종 지워진다.

햇살 속에서 다시 불린 이름은

이 시가 말하는 천국의 실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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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부르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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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줄이 나를 부르고

나는 그 부름에 기꺼이 늦어진다.”

이 대목에서 시인은 다시 시인이 된다.

늦어짐은 실패가 아니라 선택이다.

이 시에서 시는 생산물이 아니라 부름이다.

응답하는 자만이 시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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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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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연은 이 시의 윤리적 완성이다.

행복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이 문장은 현대 사회에 대한 조용한 거절이다.

이 시는 행복을 설명하지 않는다.

행복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머문다.

그래서 이 시는 감상으로 닫히지 않고,

행복을 대하는 태도로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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