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문학박사 김민정 시조-황진이에게》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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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황진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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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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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김민정


천만 겹 물결이든

만만 겹 햇살이든


우리의 한순간이

그대로 영원이다


달밤에

너를 꿈꾸는

여기, 내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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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편지 ― 황진이에게〉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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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왜 ‘황진이에게’ 쓰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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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조는 황진이를 말하지 않는다. 황진이에게 말을 건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말한다는 것은 대상을 설명의 자리로 밀어 넣는 행위지만, 말을 건다는 것은 관계를 전제하는 행위다. 제목에 붙은 ‘―에게’는 문법적 조사이기 이전에, 이 시의 미학적 방향을 규정하는 나침반이다. 이는 연구의 방향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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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시인은 황진이를 박물관 속 인물로 고정하지 않는다. 그는 과거에 머문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응답할 수 있는 ‘너’로 호명된다. 이 시조는 고전을 해석하거나 재현하는 문학이 아니다.

고전과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문학이다.

이때 시인은 설명자가 아니라, 대화의 한 자리에 서는 동등한 화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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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한 인간의 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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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오랫동안 기생, 미인, 자유연애의 상징으로 소비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은 그의 시적 본질을 가리는 얇은 막에 불과하다. 시조 속의 황진이는 무엇보다 자기 삶을 선택한 인간이었다. 그는 주어진 신분과 규범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언어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재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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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질서의 가장 낮은 곳에서 출발했음에도, 황진이는 자신의 사유와 감각으로 세계의 중심을 스스로 세웠다. 황진이는 결코 요염함에 기대는 시인이 아니었다.

그는 감정을 장식으로 쓰지 않았고, 사랑을 소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가장 냉정한 자의식으로 자신과 세계를 끝까지 응시한, 사상가적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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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이라는 황진이적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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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박사의 시조는 첫 행에서 물결을 불러낸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물과 흐름은 황진이 시조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이미지다. 물은 붙잡히지 않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흐름은 형태를 갖지 않지만, 그 흐름 속에서 삶은 방향을 얻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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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겹 / 만만 겹”이라는 반복은 과장의 언어가 아니다. 이는 수량을 늘리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차이를 지워버리는 사유의 전략이다. 천만이든 만만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선언은, 사랑을 계산과 비교의 세계에서 끌어내는 순간이다. 이 반복 속에서 물결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난이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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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수량을 거부하는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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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조는 끝까지 비교하지 않는다. 많고 적음, 깊고 얕음, 크고 작음의 언어를 철저히 회피한다. 천만과 만만은 대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성의 선언이다. 이 언어는 우열과 서열의 논리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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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시조가 그러했듯, 김민정 시조의 언어는 사랑을 경쟁의 장에서 끌어낸다. 사랑은 더 많이 주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가를 묻는 윤리적 문제다. 이 반복 속에는 버틴다는 것, 남아 있다는 것의 의미가 고요히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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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라는 위험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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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 한순간”이라는 구절은 이 시조에서 가장 대담한 선언이다. ‘나’에서 ‘너’로, 그리고 다시 ‘우리’로 나아가는 이 이동은 시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감정의 고백은 ‘나’에서 가능하지만, 책임의 언어는 ‘우리’에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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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시조가 단순한 연정시로 축소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시조는 늘 관계의 결과를 묻는다. ‘우리’는 가장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동시에 가장 무거운 단어다. 김민정은 이 위험한 단어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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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영원으로 끌어올리는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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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이 / 그대로 / 영원이다.”

이 문장은 이 시조의 사유를 결정짓는 중심축이다. 일반적으로 영원은 미래에 놓인다. 그러나 이 시조에서 영원은 미루어지지 않는다. 순간 안으로 압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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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영원을 약속하지 않는 시인이었다. 그는 늘 지금 이 순간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김민정 시인은 이 인식을 정확히 계승한다. 여기서 영원이란 시간이 길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태도의 밀도가 극대화된 상태다. 얼마나 진실하게 존재했는가, 그 진실의 밀도가 곧 영원의 척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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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고백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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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시조에서 달밤은 결코 장식적 배경이 아니다. 달밤은 거짓이 사라지는 시간이다. 낮의 언어가 체면과 제도의 언어라면, 밤의 언어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변명할 수 없는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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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에 / 너를 꿈꾸는”이라는 구절은 감상적 회상이 아니다. 이는 존재가 가장 투명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김민정 시인은 달밤을 통해 시조의 고전적 정조를 불러오되, 그 정조를 현재의 사유로 단단히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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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이라는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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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꿈꾸는’은 과거형도, 완료형도 아니다. 지속형이다. 이는 황진이를 기억 속 인물로 봉인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황진이는 이미 끝난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불리고, 계속해서 응답해야 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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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완료된 전설이 아니라 미완의 질문이다. 김민정 시인의 시조는 그 질문을 오늘의 시간 속으로 다시 데려온다. 꿈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서 계속 이루어지는 감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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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라는 장소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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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 내가 있으니.”

이 종장은 공간의 표지가 아니다. 이는 태도의 선언이다. 도망치지 않겠다는 말이며, 변명하지 않겠다는 결의다. 황진이 시조의 핵심에는 언제나 정면성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옆으로 비켜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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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시인은 이 정면성을 단 네 글자, ‘여기’에 압축한다. 쉼표 하나는 머뭇거림이 아니라, 결단의 숨이다. 이 짧은 종장은 시 전체를 다시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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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미학, 시조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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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조에는 화려한 수사가 없다. 감탄도, 설명도 없다. 그러나 말해지지 않은 여백이 많을수록 독자의 사유는 깊어진다. 이는 황진이 시조 어법의 가장 정통한 계승이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이 말하는 방식, 그것이 시조가 지닌 고전적 힘이다.

김민정 시인의 언어는 절제되어 있으되, 비어 있지 않다.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밀도다. 이 절제가 시조의 품격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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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조가 세계적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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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세계적인 이유는 황진이라는 이름의 특수성 때문이 아니다. 사랑, 시간, 존재, 책임이라는 보편적 질문을 가장 압축된 형식 안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문화권을 넘어 살아남는 고전은 언제나 형식보다 태도에서 완성된다.

김민정 시인의 〈편지- 황진이에게〉는 황진이를 기리는 시가 아니다. 그것은 황진이가 우리에게 던졌던 질문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돌려주는 시조다.

그래서 이 시조는 과거를 향하지 않는다. 지금, 독자들을 향하여 조용히 황진이의 어조로 말을 건다.

김민정 시인의 시조를 거꾸로 써보는 편지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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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에

너를 꿈꾸는

여기, 내가 있으니


우리의 한순간이

그대로 영원이다


천만 겹 물결이든

만만 겹 햇살이든


-편지

황진이에게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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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황진이에게


-김민정


천만 겹 물결이든

만만 겹 햇살이든


우리의 한순간이

그대로 영원이다


달밤에 너를

꿈꾸는

여기, 내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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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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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황진이에게)

말을 걸며 대화를 시작하는 고전문학의

시도가 꿈꾸듯 새롭다


그 꿈꾸는 시조의 세계가

영원을 꿈꾸는

여기, 시인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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