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정연수 시인 ~무수히 건너 흐른다)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무수히 건너 흐른다


정연수


바람이 머물던 자리는

깊은 여백이 되어

별 하늘을 건네준다


세월을 녹여

봄을 불러오듯

강물은 제 몸을 흘려

바다라는 품에 안긴다


해와 달의 경계에서

하늘과 별의 숨결로

강물처럼 말없이

바다에 닿고 싶다


슬픔이 잠시 쉬었던

자리마다

색을 물들이지 않은

여운만 남긴 채

다시 한번

세상을 안고 싶다


제목이 먼저 말을 건네는 시


「무수히 건너 흐른다」라는 제목을 읽는 순간, 이 시는 이미 시작되었다. 무엇을 건너고 무엇을 흐르는지 굳이 말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 아니라 과정이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건너왔고, 그만큼 많이 흘러왔다는 고백. 이 제목은 삶을 요약하지 않고, 삶을 통과해 온몸의 감각을 그대로 내놓는다.


바람이 떠난 자리


바람은 언제나 지나가는 존재다. 붙잡을 수도, 머물게 할 수도 없다.

시인은 그 바람을 애써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바람이 떠난 자리를 바라본다. 그 자리는 공허하지 않다. 깊은 여백이 되고, 그 여백이 별 하늘을 건네준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보다 부재, 말보다 침묵이 되었다.


여백은 비어 있지 않다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이 지나가서 남겨진 자리다.

이 시의 여백은 시간의 퇴적층이다. 바람, 세월, 슬픔이 다녀간 흔적이 겹겹이 쌓여서 결국 하늘을 건네줄 수 있는 깊이가 된다.

시인은 그 깊이를 조용히 믿는다.


강물처럼 살아가는 것


강물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 흐르지 않겠다고 버티지도 않고, 바다에 닿겠다고 서두르지도 않는다.

그저 제 몸을 흘린다.

이 시에서 강물은 삶의 방식이다. 억지로 견디지 않고, 버티지 않고, 스스로를 흘려보내는 태도. 그래서 결국 바다라는 품에 안긴다.


경계에 서서


해와 달의 경계는 애매한 자리다. 낮도 밤도 아닌 시간, 확신도 포기도 아닌 상태. 그러나 이 시는 그 경계를 불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에서 하늘과 별의 숨결을 듣는다.

모든 것이 분명해진 뒤가 아니라, 아직 분명해지지 않은 순간에서 시는 가장 깊어진다.


말없음의 힘은


“강물처럼 말없이”라는 구절은 이 시의 중심에 놓여 있다.

말하지 않겠다는 선택, 드러내지 않겠다는 태도. 이 침묵은 회피가 아니다.

충분히 건너왔고 또한 충분히 흘러왔기에 가능한 침묵이다. 이 시의 말없음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이미 많은 것을 겪은 이후의 고요다.


슬픔을 남기는 방식


이 시에서 슬픔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잠시 쉬었다 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색이 아니라 여운이다. 시인은 슬픔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과장하지 않고, 붙잡지 않는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의 온기만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그 태도는 성숙하고 단정하다.


다시 세상을 안는 이유


마지막에 이 시는 말한다.

다시 한번 세상을 안고 싶다고. 이는 처음의 순진한 포옹이 아니다. 무수히 건너 흐른 뒤에야 가능한 안음이다.

상처와 침묵, 여백과 슬픔을 다 통과한 이후의 포용의 세계이다.

이 시는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대신 세상을 다시 품을 수 있는 마음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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