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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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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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언 시인
시인詩人이라는 호칭
청민 박철언
대부분의 시인인 어느 문학회 단톡방엔
시인이란 호칭이 거의 없다
한결같이 존경받는
회장님 교수님 이사장님 박사님만
무더기로 층층이 모여 산다
흔해 빠진 호칭 대신
시인이나 평론가가 드물게 등장할 때
제자리 찾은 담백한 호칭 때문인지
수식어 다 뗀 채로도 스스로 빛나는 호칭
‘존경하는’이라는 거품 빼도
이미 기품 있는 당당한 이름
그냥 시인
그 이상 뭘 더 높일까
몇십 년을 과분한 호칭으로 살았으니
이젠 어떤 옷도 걸치고 싶지 않다
몸 안으로 바람도 햇살도 마음대로 드나들어
언제든 시詩도 되었다가 시인도 되는
그냥 시인이 좋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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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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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누구를 설득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냥 우리 일상의 한 장면을 가만히 펼쳐 보일 뿐이다.
문학회 단톡방,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리는 작은 화면 속 풍경. 우리는 그 안에서 수많은 이름들을 본다. 회장님, 교수님, 이사장님, 박사님.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인’이라는 말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바로 그 낯선 공백에서 출발한다.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사소한 어색함 하나. 그 미세한 불편함이 이 작품의 첫 숨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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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은 원래 존중의 말이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사람을 가리는 가면이 되었다.
이름 앞에 길게 붙는 직함들은 사람을 높여 놓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멀리 밀어낸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체온 대신 단단한 명패만 남는다. “무더기로 층층이 모여 산다”는 표현에는 그 답답함이 그대로 배어 있다.
마치 콘크리트 벽처럼, 권위가 겹겹이 쌓여 숨을 막는다.
사람보다 직책이 먼저 보이는 풍경. 그곳에서 인간은 점점 희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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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공기가 달라진다.
짧고, 맑고, 가볍다.
무엇을 이루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었는지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냥 한 사람이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그 단순함이 더 깊다.
수식어를 걷어냈을 뿐인데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화려함을 덜어냈더니 본질이 남는다. 이 담백함이야말로 시가 지닌 품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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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이 위계를 만드는 말이라면 시인은 존재를 드러내는 말이다. 전직 장관이라는 호칭은 과거의 시간을 설명하지만, 시인이라는 이름은 지금 살아 있는 숨결을 건넨다.
하나는 경력이고 다른 하나는 삶이다. 경력은 기록 속에 남지만 삶은 사람 속에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자연스레 깨닫는다.
결국 기억되는 것은 직위가 아니라 태도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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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시인.” 이 짧은 말에서 오래 발걸음이 멈춘다. ‘그냥’이라는 부사에는 욕심이 없다.
더 높이 불리고 싶다는 마음도, 더 화려해지고 싶다는 계산도 없다.
그런데 그 말이 이상하게도 가장 단단하다.
사람은 무엇이 되려고 애쓸 때보다, 그냥 자기 자신일 때가 가장 아름답다.
이 시는 우리를 위로 올려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안쪽으로, 마음 깊은 자리로 데려간다.
그 돌아옴이 성숙이고, 그 멈춤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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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옷도 걸치고 싶지 않다”는 고백에서는 한 사람의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여기서 옷은 사회가 입혀 준 겉옷들, 직함과 체면과 명예다. 그 옷들은 빛나 보이지만 무겁다. 걸칠수록 어깨가 굳고, 숨이 짧아진다.
그래서 그는 벗는다. 하나씩, 조용히. 체념이 아니라 해방처럼. 많이 가질수록 무거워지고, 덜 가질수록 가벼워진다는 단순한 진실을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가벼움 속에서 비로소 사람은 자기 걸음으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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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바람과 햇살의 이미지는 그 자유를 환하게 비춘다.
직함의 세계가 닫힌 방이라면 시인의 세계는 창문이 활짝 열린 들판이다.
바람이 들어오고 햇살이 스민다.
호흡이 길어진다.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되는 시간,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삶.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느슨해진다.
시인은 이제 직책에 묶인 사람이 아니라 계절과 함께 사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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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시도되었다가 시인도 되는”이라는 구절은 오래 남는다.
보통 우리는 시를 쓴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삶 자체가 이미 시가 된다. 존재와 언어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하루의 걸음, 한 번의 숨, 작은 시선까지도 모두 문장이 된다.
그때 시인은 직업이 아니다.
하나의 태도이고 하나의 세계이다. 그래서 ‘시인’이라는 말은 더 이상 명함 위의 직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얼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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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시가 우리에게 건네는 대답은 단순하다. 화려한 자리는 잠시 빌려 쓰는 이름일 뿐이지만, 시인은 스스로 살아낸 시간의 이름이라는 것. 권력은 지나가고 직함은 바뀌지만, 한 줄의 언어는 오래 남는다. 우리는 결국 사람을 직책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가 어떻게 숨 쉬고 어떻게 마음을 건넸는지로 기억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한 이름만 남는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그러나 깊게 울리는 그 이름.
'박철언 시인'.
그 한마디가 시인의 삶을 가장 따뜻하게, 그리고 가장 인간답게 말해 주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라면 다 알 수 있는 청민 박철언 시인
오늘은 시인이라는 호칭이 전달되는 무거움을 덜어내려는 박철언 시인의 마음을 알게 되어서 평론도 대화하듯, 하게 되어 마음이 한결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