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문학박사 김민정 ~절벽의 힘》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


김민정 시조


절벽의 힘


계단을 가파르게

오르고 올라가서


갓바위 부처님을

머리 숙여 영접하니


흰 구름 이고 앉으신

자태마저 영험하지


숲숲골골 암자들을

품어 안고 굽어보며


중생들 아픈 사연

큰 귀 늘여 들으시나


나는야, 산수진경에

소원 반을 이뤘지


절벽 앞에서


이 시의 제목인 ‘절벽’은 단순한 공간 지시가 아니다.

절벽은 언제나 인간이 자신을 시험받는 자리다.

완만함이 사라지고, 더 이상 편의가 허락되지 않는 지점.

이 시는 바로 그 경계에서 말을 꺼낸다.

김민정 시인의 시조가 늘 그렇듯, 이 작품 역시 평지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힘은 안락함에서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는 제목 하나로 먼저 건네고 잠시 멈춘다.


오르는 몸의 감각


“계단을 / 가파르게 / 오르고 / 올라가서”


이 연은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몸이 먼저 움직인다.

‘오르고’와 ‘올라가서’의 반복은

불필요한 중복이 아니라

숨을 고르는 리듬에 가깝다.

읽는 동안 독자는 해석자가 아니라

같이 계단을 오르는 사람에 가까워진다.

이 시조의 첫 설득은 논리가 아니라 호흡이다.


머리를 숙인다는 말


“갓바위 / 부처님을 / 머리 숙여 / 영접하니”


화자는 ‘본다’ 거나 ‘만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접한다’는 말은

먼저 자세를 낮추는 쪽을 선택한 언어다.

여기에는 종교적 감탄보다

자기 태도에 대한 선택이 앞선다.

김민정 시인의 시조는

신앙의 언어를 높이지 않는다.

대신 낮춘 채로 오래 둔다.


구름의 자리


“흰 구름 /이고 / 앉으신 / 자태마저 / 영험하지”


부처는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구름이다.

이 장면은 초월의 연출이라기보다

자연이 스스로 예를 갖추는 순간에 가깝다.

인간이 장엄함을 덧붙이지 않아도,

산과 구름은 이미 충분하다.

그래서 이 영험함은 조용하다.


숲과 골짜기 사이


“숲숲골골”이라는 반복어는

시야를 넓히면서 동시에 깊게 만든다.

암자들을 “품어 안고 / 굽어본다”는 표현에는

지배의 시선이 없다.

높음이 우월함으로 바뀌지 않는 지점,

이 시조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다.

높은 자리는 내려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싸기 위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 대목에서 조용히 고개를 든다.


듣는 쪽으로


“중생들 / 아픈 사연 / 큰 귀 늘여 / 들으시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눈도, 입도 아닌 귀다.

이 부처는 말하지 않는다.

판단하지도, 약속하지도 않는다.

다만 듣는다.

이 태도는 시 속 부처의 자세이면서

동시에 시인이 세계를 대하는 방식처럼 보인다.

김민정 시인의 시조는

말하는 존재보다 듣는 존재 쪽에

늘 조금 더 마음을 둔다.


나에게로 돌아오는 순간


앞선 연들에서 시선은 계속 위로 향해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이르러

아주 조용히 안으로 접힌다.


“나는야,”


이 쉼표 하나가

이 시를 과장하지 않게 만든다.

선언도 감탄도 아닌

조심스러운 자기 호출.

자연이 완성되어 보이는 순간,

인간의 욕망은 스스로 반으로 줄어든다.

그래서 “소원 반을 / 이뤘지”라는 말이 가능해진다.

이 시는 말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남겨둔다.

높은 곳에서 무엇을 얻었다기보다

높은 곳에서

조금 내려놓은 마음이다.

그래서 이 시조는 크지 않지만 깊고,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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