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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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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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우 시인, 연극인
저녁 창에 빛이 고이고
오늘도 하루를 조용히
인출한다
주머니 깊숙이 접힌
영수증 몇 장
구겨진 동전처럼 남은 숨
창틀 위로
바람 한 푼 내려앉고
별 하나
어둠 쪽으로 미끄러진다
계산기를 두드리다
불이 꺼진 화면에
내 얼굴이 겹친다
잔고를 묻지 않은 채
창문은
조용히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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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내가 조회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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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다가 저는 습관처럼 휴대폰 은행 앱을 열어보던 제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잔고는 숫자로 나오는데, 이상하게 마음의 잔고는 늘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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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하루를 조용히 인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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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줄이 오래 남았습니다.
하루가 저축되는 것이 아니라 빠져나간다고 말하는 태도.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버는 게 아니라, 조금씩 꺼내 쓰며 살아간다는 것을.
입금은 없고 인출만 있는 통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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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 영수증 몇 장.
그건 단순한 소비 기록이 아니라, 오늘 내가 어디에 서 있었는지의 흔적 같습니다.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샀고, 무엇을 놓쳤는지.
그런데 시인은 돈이 아니라 “구겨진 동전처럼 남은 숨”이라고 말합니다.
그 표현에서 저는 잠깐 멈췄습니다.
남은 것은 지폐가 아니라 호흡.
오늘 하루를 끝까지 견디고 남은 것은 결국 숨 몇 번이었겠구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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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한 푼”이라는 말도 좋았습니다.
거창하지 않습니다.
딱 한 푼.
삶은 큰 사건보다 이런 작은 단위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별 하나가 어둠 쪽으로 미끄러지는 장면에서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이 시는 끝까지 조용합니다.
마치 하루가 다 지나가도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는 무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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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는 계산기 장면에서 멈춰 섰습니다.
불이 꺼진 화면에 겹친 얼굴.
그건 숫자를 세다가 결국 자기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입니다.
얼마를 벌었는지가 아니라,
어떤 표정으로 오늘을 마쳤는가.
잔고는 통장에 남는 게 아니라 얼굴에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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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구절.
“잔고를 묻지 않은 채 / 창문은 / 조용히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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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도가 좋았습니다.
확인하지 않는 용기.
오늘이 적자였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계산하지 않는 저녁.
모든 삶이 흑자일 필요는 없다는 듯이,
그냥 창문을 닫습니다.
이 시를 덮고 나니,
저도 괜히 창밖을 한 번 더 보게 됩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인출했는지,
그리고 무엇이 남았는지.
아마도 이 시의 진짜 잔고는 숫자가 아닐 것입니다.
하루를 끝까지 살아낸 사람의 고요한 체온,
연극무대에서
주인공으로
시인이 되어 시 한수를 읊던
그것이 저녁에 남는 "잔고"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호주머니에 남겨진 잔액이
삶의 소중한 잔고의 금화들처럼 반짝이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따뜻한 온기로 살아왔던 것처럼
잔고를 묻지 않으려는 다짐으로 들립니다.
시인의 생애에서 시인으로 불리든,
연기자로 남든,
따뜻한 철학자로
기억하든 소중한
한 닢의 금화 같은 오늘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