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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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고도의 별 — 정령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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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옥
흰 구름에 잠긴 천산, 바람이 길목을 지키는데,
티끌 같은 그림자 하나, 길 위를 외로이 걷는다
벼랑 끝을 딛고 가는 나그네의 발걸음,
천 길 허공을 넘어, 은하의 별빛으로 머릴 감는다
눈보라 몰아쳐도, 짐을 진 채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거친 숨 뱉어내며, 뚜벅뚜벅 남긴 피맺힌 발자국
안개 젖은 벼랑길의 선승, 달을 보고 웃는다
검푸른 하늘바다에 몸을 던져도 맘은 깃털 같다
밤하늘 별빛 우러르며, 움켜쥠을 내려놓고,
얻음과 잃음도 버리고, 사람 가는 길에 등불을 켠다
*정령(貞靈): 곧은 사람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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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길 위의 한 인간을 통해 존재의 품격을 묻는 작품이다. 차마고도라는 거대한 공간은 단순한 지리적 배경이 아니라, 인간 정신이 통과해야 할 운명의 협곡처럼 펼쳐진다.
‘흰 구름에 잠긴 천산’이라는 첫 장면은 세계의 높이와 깊이를 동시에 열어 보이며, 그 거대한 자연 속에 ‘티끌 같은 그림자’로 선 인간을 대비시킨다.
이 미세한 존재감은 곧 겸허한 인간 인식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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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과 허공을 건너는 장면은 육체의 고단함을 넘어 정신의 비약을 보여준다. ‘은하의 별빛으로 머릴 감는다’는 표현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다. 의식의 정화이며, 고난 속에서 오히려 우주적 차원으로 상승하는 영혼의 순간을 그린다. 길은 아래로 이어지지만 정신은 위로 열린다.
이 수직적 긴장은 시의 가장 아름다운 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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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에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대목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건드린다. 영웅적 과장이 없다.
대신 ‘뚜벅뚜벅’이라는 소리 없는 리듬이 삶의 진짜 무게를 전한다.
피 맺힌 발자국은 고통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살아 있음의 증거다. 이 장면에서 시는 장엄해지기보다 진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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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부에 등장하는 ‘선승’은 이 시의 정신적 중심이다. 그는 싸우지 않고도 높다. 안개 젖은 벼랑길에서 달을 보고 웃는 모습은 세속적 성취와 거리를 둔 자의 평온이다.
육신은 절벽 위에 있으나 마음은 이미 가벼워졌다. ‘맘은 깃털 같다’는 구절은 비움이 만들어낸 자유를 맑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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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검푸른 바다’로 바라보는 시선은 공간 인식의 전환을 보여준다.
위와 아래가 뒤집히고, 떨어짐과 떠오름이 하나가 된다.
이는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같은 이분법을 넘어서는 시적 사유다.
존재는 추락하지 않는다.
방향을 바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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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의 별빛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윤리적 빛이다. ‘움켜쥠을 내려놓고’라는 표현에서 시는 소유의 본능을 벗겨낸다.
쥐고 있던 손을 펴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길의 일부가 된다. 얻음과 잃음의 계산을 멈출 때 삶은 더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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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행의 ‘등불’은 이 시가 도달한 결론이다. 길을 걷는 자가 길을 밝히는 자로 바뀐다.
이는 수행자의 자리이며, 동시에 인간다움의 자리다.
고행 끝에 남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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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옥 시인은 장엄한 자연을 빌려 인간의 내면을 말한다. 과장하지 않고, 꾸미지 않고, 묵묵히 걷는 존재의 품위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시는 크기보다 깊이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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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이라는 말이 제목에 놓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곧은 영혼은 요란하지 않다.
다만 끝까지 걷고, 끝내 비우고, 마지막에 불을 켠다.
이 시는 그 조용한 위대함을 차마고도의 별빛처럼 오래 비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