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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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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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 이민숙
이젠 잊혀도 그만이다
무성한 사연을 떨군
앙상한 곁가지
차고도 깨끗한 바람이 스친 뜨락
텅 빈 여백에
제비 한 쌍 봄을 물고 왔네
아직도 그 사랑이 남아 있었던가
얼어 터진 상처를 겨우 봉합한
회색빛 겨울이 다녀 간
허허로운 자리
숭숭 구멍 뚫린 긴 겨울
휑하니 불어대던 시린 바람
겨울과 봄 사이 벌어진 틈으로
포릉 포르릉 포릉 지즐대는 날갯짓
진흙 물어다 촘촘히 지은 집
한 계절 지나면
미련 없이 다 버리고
푸른 창공으로 훌훌 날아가
까맣게 잊고 새살림 차릴 텐데
부리에 물고 온 씨앗 하나
흙담에 툭 떨구고
닫힌 봄을 쪼아대며
봄 문을 열었다
그 분홍빛 날갯짓에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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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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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 이민숙 시인의 「제비」는 계절의 도착을 노래하는 시이면서, 그보다 먼저 계절이 오기까지의 시간을 깊이 견디는 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봄이 아니라 겨울이 남긴 자리, 곧 비어 있는 시간과 상처의 흔적이 놓여 있다. 그래서 이 시의 봄은 단순한 계절의 전환이 아니라, 오래 비어 있던 자리 위에 다시 얹히는 생명의 감각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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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행 “이젠 잊혀도 그만이다”는 체념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이미 지나간 시간에 대한 조용한 결산이 담겨 있다. 이어지는 “무성한 사연을 떨군 / 앙상한 곁가지”는 삶의 무게를 털어낸 자리,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는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위를 스치는 바람이 “차고도 깨끗한” 바람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절망으로 기울지 않는다. 비워진 자리에는 이미 다음 계절을 받아들일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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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연에서 등장하는 제비는 단순한 철새가 아니다. “텅 빈 여백에 / 제비 한 쌍 봄을 물고 왔네”라는 구절에서 제비는 계절을 운반하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여백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새로 쓰일 공간이며, 그 자리에 도착한 제비는 잊힌 줄 알았던 감정과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 “아직도 그 사랑이 남아 있었던가”라는 물음은 자연의 순환을 인간의 내면과 포개며, 살아간다는 일이 결국 다시 사랑을 기억해 내는 과정임을 은근히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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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부에서 시는 겨울의 깊이를 구체적으로 복원한다. “얼어 터진 상처”, “숭숭 구멍 뚫린 긴 겨울”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계절 묘사를 넘어, 생명과 온기가 빠져나간 시간을 보여준다. 이때 들려오는 “포를 포르릉 포릉”의 소리는 정적을 깨는 생명의 첫 신호다. 이 청각적 리듬은 시 전체에 숨을 불어넣으며, 멈추어 있던 시간에 다시 움직임을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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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제비의 삶은 또 다른 의미를 드러낸다. “진흙 물어다 촘촘히 지은 집 / 한 계절 지나면 / 미련 없이 다 버리고”라는 구절은 집을 짓고 떠나는 생의 순환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여기에는 소유보다 흐름을 따르는 생의 방식이 담겨 있다. 인간에게는 어렵지만, 자연에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 이 장면은 삶이란 결국 머무름과 떠남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임을 조용히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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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연에서 시는 하나의 작은 사건으로 완성된다. “부리에 물고 온 씨앗 하나”는 생명의 축약된 형태이며, 가능성의 핵심이다. 그 씨앗이 “닫힌 봄을 쪼아대며 / 봄 문을 열었다”는 대목에서, 봄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움직임에 의해 열리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는 자연의 장면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은유다. 굳게 닫혀 있던 마음 역시 아주 미세한 계기로 다시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장면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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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구절 “그 분홍빛 날갯짓에 꽃이 핀다”는 이 시의 정서를 가장 부드럽게 매듭짓는다. 꽃은 나무에만 피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에도 피어난다. 날갯짓이라는 순간적인 동작이 꽃으로 변환되는 이 상상력은, 생명이란 결국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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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봄을 노래하면서도 봄을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비어 있는 자리와 상처의 시간을 충분히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제비를 등장시킨다. 그래서 이 작품의 봄은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다. 제비는 단순한 계절의 새가 아니라, 잊힌 줄 알았던 생명의 감각을 다시 깨우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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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비」는 계절의 시이면서, 상처 이후에 다시 시작되는 삶의 시다.
비어 있음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가 닫힌 시간을 다시 열 수 있다는 희망이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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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문인협회 대표 오선 이민숙 시인은
시대와 장르를 초월하여 가슴에 와닿는
시를 많이 발표하면서 국제무대에서도
시인으로 인정받는 작가이다.
sns에서의 인지도가 높은 작가이기도
하다. 음악을 전공한 시인은 무엇하나
소흘함이 없이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박성진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