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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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분 2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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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훈 박은선
플레이어는 저녁밥을 주는 시간
돌아가는 태엽의 되감기는
여전히 건재함을 알리는 듯
젓가락 장단에 맞춘 재깍재깍 소리
볼륨을 높여
볼륨을 높여
우리의 플레이리스트
카바티나*
단조로운 태엽에 심장이 뛴다
세상의 모든 음악
손 편지 사연이 들려온다
1분 23초
신청곡 디어헌터 ost 재생시간은
4분 10초
식탁 위 해맑은 초침의 웃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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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23초의 신청곡 디어헌터 ost 음악
재생시간 4분 10초 아리아를 통하여 어떻게 시간을 심장으로 바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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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가장 먼저 들리는 것은 ‘생활의 리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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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선 시인의 「1분 23초」는 길지 않은 시이지만, 매우 정교하게 짜인 청각의 시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보이는 장면”보다 “들리는 시간”으로 시작한다. “플레이어는 저녁밥을 주는 시간”이라는 첫 행부터 독자는 시계와 음악기기와 식탁이 한 공간 안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저녁의 생활 현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대단한 사건은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시는 성공한다. 거창한 비극이나 격렬한 서사를 앞세우지 않고, 일상의 저녁 식탁 위에 놓인 소리 몇 개만으로도 인간의 정서가 얼마나 풍요롭게 살아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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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시간을 숫자로 설명하지 않고, 소리의 감각으로 바꿔 놓는다는 점이다. “태엽의 되감기”, “젓가락 장단”, “재깍재깍”은 각각 다른 층위의 리듬이다. 하나는 기계적 리듬이고, 하나는 생활의 리듬이며, 하나는 시간 그 자체의 리듬이다. 그런데 이 셋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작은 합주처럼 놓인다. 이 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음악시가 된다. 음악이 따로 등장하기 전에 이미 시 전체가 음악적 박자를 갖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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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 작품의 시작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다. 시간을 먹고사는 인간의 저녁이, 소리를 통해 살아 있는 존재의 리듬으로 변환되는 순간이다. 이 변환이 성공했기 때문에 뒤에 나오는 “카바티나”와 “디어헌터 ost”는 외부의 삽입물이 아니라, 이미 준비된 정서의 강물 위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음악적 기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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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23초’라는 제목은 왜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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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제목은 매우 인상적이다. 보통 시의 제목은 정서나 이미지, 혹은 상징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은 “1분 23초”라는 구체적 시간 단위를 제목으로 세운다. 이 숫자는 단순한 계측이 아니다. 오히려 계측 가능한 시간을 계측 불가능한 감정으로 바꾸는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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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시간은 늘 흘러가지만, 모든 시간이 동일한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밥을 먹는 시간, 음악이 흐르는 시간, 신청곡 사연이 들려오는 시간, 식탁 위 초침이 웃는 시간은 물리적으로는 짧을지 몰라도 정서적으로는 길어진다. 반대로 어떤 시간은 한 시간이 지나도 텅 빈 채로 남는다. 이 시는 바로 그 차이를 안다. 그래서 “1분 23초”는 짧은 시간이 아니라, 압축된 생의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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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흥미로운 것은 시 안에 “신청곡 디어헌터 ost 재생시간은 / 4분 10초”라는 문장이 들어오면서 제목의 1분 23초와 음악의 4분 10초가 대비된다는 점이다. 제목 속 시간은 체험된 시간이고, 음악의 재생시간은 측정된 시간이다. 체험과 측정, 감정과 기계, 식탁과 플레이어가 서로 마주 보며 긴장을 만든다. 그런데 시는 이 둘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측정된 음악의 길이가 체험된 시간의 밀도를 더 짙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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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이 제목은 단순한 특이성이 아니다. 이 시의 핵심 철학이다. 인간은 시계를 살지만, 실제로는 숫자가 아니라 정서의 밀도로 시간을 기억한다는 것. 박은선 시인은 그 사실을 아주 짧은 제목 하나로 증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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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핵심은 음악의 ‘삽입’이 아니라 음악의 ‘내면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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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가 음악 제목이나 작곡가 이름을 인용한다. 그러나 그 인용이 단지 교양의 표지에 머물 때가 많다. 이 시는 다르다. 여기서 “카바티나”는 배경지식 자랑이 아니라, 시 전체의 숨결을 바꾸는 열쇠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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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륨을 높여 / 볼륨을 높여 / 우리의 플레이리스트 / 카바티나 / 단조로운 태엽에 심장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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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시인은 음악을 듣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음악이 들어오자 “단조로운 태엽”에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태엽은 기계의 반복이고, 심장은 생명의 박동이다. 즉 음악은 반복되는 일상을 생명의 떨림으로 바꾸는 매개다. 이것이 음악의 내면화다. 음악은 외부에서 흘러나오는 음원이 아니라, 사물의 내부에 숨어 있던 생명성을 깨우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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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론하고 「1분 23초」는 단순한 음악 감상 시가 아니다. 오히려 음악이 인간의 생활 내부로 어떻게 스며드는지, 그리고 그 생활의 미세한 순간을 어떻게 환하게 밝혀 주는지를 보여주는 생활서정시라고 해야 한다. 식탁과 초침과 젓가락이라는 평범한 오브제들이 음악 앞에서 갑자기 정서의 악기로 변한다는 사실이 이 시의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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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작품에서 음악은 장식이 아니라 변환의 힘이다. 기계적 시간에서 생명적 시간으로, 반복에서 박동으로, 식사 시간에서 기억의 시간으로 넘어가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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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티나’라는 선택은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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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티나(cavatina)는 원래 오페라에서 쓰이는 음악 형식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반복이 많지 않은 비교적 짧고 선율적인 아리아를 가리킨다. 카바티나를 오페라와 칸타타, 기악음악에 나타나는 형식으로 설명하며, 오페라에서는 대체로 한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간명한 독창곡이라고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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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의를 염두에 두고 시를 다시 읽으면, 박은선 시인이 왜 하필 “카바티나”를 불러왔는지가 선명해진다. 이 시는 화려한 교향악이 필요하지 않다. 이 시의 공간은 거대한 공연장이 아니라 저녁 식탁이고, 이 시의 정조는 장대한 비극이 아니라 조용히 번져오는 정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웅대한 오케스트라보다 단순하고 서정적인 선율, 즉 카바티나가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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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카바티나라는 말이 지닌 “단순함”과 “멜로디의 아름다움”은 이 시의 구조와도 닮아 있다. 「1분 23초」는 언어를 과시하지 않는다. 과격한 수사도 없다. 대신 작은 소리들을 모아 부드러운 선율처럼 끌고 간다. 이 점에서 이 시 자체가 하나의 카바티나라고 할 수 있다. 짧고, 서정적이며,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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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각주에서 “아리아보다 단순한 형식”이라고 붙여놓은 설명 역시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한 사전 풀이가 아니라, 자신의 시적 태도를 은근히 드러내는 메타적 주석처럼 읽힌다. 복잡한 감정을 복잡한 말로 과장하지 않고, 가장 일상적인 장면 속에서 가장 맑은 서정을 끌어내겠다는 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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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헌터」의 ‘Cavatina’가 이 시에 불러오는 정서적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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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vatina”는 영국 작곡가 스탠리 마이어스가 만든 곡으로, 원래 1970년 영화 The Walking Stick을 위해 쓴 음악에서 발전한 작품이며, 이후 기타리스트 존 윌리엄스의 연주와 함께 1978년 영화 The Deer Hunter의 테마로 널리 알려졌다. 브리태니커와 기타 고전기타 자료, 그리고 관련 개요 자료들 역시 이 곡이 The Deer Hunter를 통해 대중적으로 강하게 각인되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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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지점이 시의 음악평론적 핵심이다. The Deer Hunter와 연결된 “Cavatina”는 단순히 아름다운 기타 선율이 아니다. 그 음악은 평화로운 일상과 전쟁의 상흔, 인간의 상실과 침묵, 그리고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그리움의 정조를 함께 품고 있다. 영화의 서사 전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 곡은 듣는 이에게 이상하리만큼 맑고도 아픈 울림을 준다. 아름다운데 슬프고, 슬픈데 지나치게 무겁지 않다. 오히려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더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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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선 시인의 시에서 이 곡은 저녁 식탁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온다. 여기서 대단히 아름다운 역전이 일어난다. 전쟁과 상실의 그림자를 품은 영화음악이 어느 집의 식탁 위에서 “해맑은 초침의 웃음소리”와 만나는 것이다. 이 만남은 불협화음이 아니라, 인간 삶의 진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비극의 음악도 밥 먹는 저녁에 듣고, 오래된 상실의 선율도 가장 평범한 하루 속에서 받아들인다. 예술은 특별한 시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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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선 시인의 디어 헌터의 카바티나를 두 번 강조한 시와 곡의 선택은 DJ나 방송에서 들어본 선율적인 아리아로 단조로운
삶에 서정의 곡의 태엽처럼 감긴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시인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