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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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봄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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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위 환
봄은 결로 온다
피어나는 쪽과 저무는 쪽
그 사이를 흐르는 미세한 무늬
안에서 차오른 빛이
캄캄한 생의 내벽을 허물 때
미명의 숨들은 서로를 밀어내며
봉인된 시간을 일깨운다
꽃은 안다
흩어짐을 먼저 수혈받아야
가장 눈부신 정점을 떼어낼 수 있음을
바람은 여태 작별이 서툴러
머무는 법 대신 흔들림을 택하고
우리는 그 서늘한 경계 위에 서서
서로의 생을 투명하게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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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을 껴안는 봄, 그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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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으면 먼저 따뜻함이 아니라 서늘함이 스며든다. 보통 봄은 피어남의 계절로 불리지만, 사위환의 봄은 시작부터 다르다. “결로 온다”는 한 문장이 이 시의 온도를 정한다. 봄은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틈에서 조용히 맺히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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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생을 하나의 단선으로 보지 않는다. 피어나는 쪽과 저무는 쪽이 동시에 존재하는 자리, 바로 그 사이의 “미세한 무늬”를 바라본다. 이 무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흐름이다. 우리는 늘 결과만 보지만, 이 시는 그 사이의 떨림과 이동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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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명의 숨들이 서로를 밀어낸다”는 구절에서는 생명이 탄생하는 장면조차 평온하지 않다. 태어남은 충돌이며, 밀어냄이며, 균열이다. 이 지점에서 시는 단순한 자연 묘사를 넘어 존재의 본질로 들어간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미 어딘가를 밀어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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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울림은 역시 꽃에 대한 인식이다. 꽃은 피기 위해 먼저 흩어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역설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한 통찰이다. 가장 눈부신 순간은 가장 빠르게 사라지는 순간과 겹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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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선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떠올리게 한다. 릴케 역시 존재를 완성된 형태로 보지 않았다. 그는 늘 ‘열려 있는 상태’, ‘안과 밖이 동시에 흐르는 상태’를 응시했다. 사위환의 시 또한 꽃과 바람, 그리고 인간을 통해 그 경계의 순간을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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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바람은 작별이 서툴러 흔들림을 택한다”는 구절은 인간의 감정까지 건드린다. 우리는 떠나는 법을 잘 모른다. 그래서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완전히 머무르지도 못한 채 흔들린다. 이 시는 그 흔들림을 실패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존재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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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연에서 “서로의 생을 투명하게 들여다본다”는 문장은 조용하지만 깊다. 투명하게 본다는 것은 이해를 넘어선다. 그것은 서로가 언젠가 사라질 존재라는 사실을 함께 인식하는 일이다.
결국 이 시의 봄은 환희가 아니다.
사라짐을 이미 품고 있는 시작,
그 얇은 경계 위에 서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 시를 읽고 나면
꽃은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아프게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