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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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경 아래 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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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주
현미경 아래로 얼굴을 낮추면
어둠 속에서 작은 빛들이 떠오른다
세포의 호흡,
미생물의 떨림,
유리 슬라이드 위에 펼쳐진 은밀한 우주
사람들은 그것을 실험이라 부르지만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같다
한 점의 움직임에도
마음이 기울고
미세한 반응에도
가슴이 먼저 뛴다
유리관을 타고 흐르는 액체는
은하수처럼 맑고
배양접시 위의 작은 생명은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난다
이 미세한 세계가
누군가의 고통을 멈추게 하고
누군가의 시간을
조금 더 늘려 줄 수 있기에
밤이 깊어도 나는
형광등 아래 자리를 지킨다
실패의 기록을 넘기며
다시 시작을 적는다
현미경 아래 별빛처럼
작고 또렷한 세계를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조용히 생명의 편에 선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 또렷해지고
나의 눈 속에는 지금도
그 별빛이
가만히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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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의 심연과 윤리의 발광 — 남영주 시인 「현미경 아래 별빛」을 읽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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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단순히 ‘과학을 노래한 시’가 아니다. 그것은 인식의 구조 자체를 전복하는 시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때 전제해 온 가장 기본적인 질서, 즉 ‘큰 것은 숭고하고 작은 것은 미미하다’는 위계를 이 작품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해체한다. 현미경 아래 놓인 세계는 더 이상 축소된 현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감각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밀도 높은 우주이며, 존재의 본질이 응축된 장소로 재구성된다.
이 시에서 ‘작음’은 결핍이 아니라 응집이며, 축소가 아니라 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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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첫 연은 그 전환의 문턱을 형성한다. 얼굴을 낮춘다는 행위는 단순한 관찰의 자세가 아니라, 일종의 존재론적 겸손을 요구하는 몸짓이다. 고개를 들어 별을 보던 인간이 이제는 고개를 숙여 세계를 본다.
이때 시선의 방향은 곧 사유의 방향을 바꾼다. 전통적 서정시가 하늘을 향해 상승하는 감각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이 시는 하강의 운동 속에서 새로운 숭고를 발견한다.
그 하강은 추락이 아니라 침잠이며, 그 침잠은 무가 아니라 충만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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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의 호흡, 미생물의 떨림”이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과학적 명명과 시적 감각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호흡’과 ‘떨림’이라는 단어의 선택이다.
그것은 생리적 사실을 기술하는 동시에, 생명에 대한 정서적 동조를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이 시는 객관적 관찰을 넘어서 ‘감응의 윤리’로 이동한다.
대상은 더 이상 분석의 객체가 아니라, 함께 호흡하는 존재로 재위치 된다. 이때 과학은 냉정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냉혹함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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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특히 주목할 만한 이유는 ‘실험’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다. 일반적으로 실험은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실패는 그 과정에서 제거되어야 할 부산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실패의 기록을 넘기며 / 다시 시작을 적는다”는 구절은 실패를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시간의 층위 속에 축적한다.
실패는 무의미가 아니라 다음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이는 과학의 본질에 대한 매우 정확한 이해이자, 동시에 인간 존재의 방식에 대한 은유다.
인간 역시 실패를 통해 지속되며, 그 실패의 기록 위에서만 다음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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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부에서 등장하는 “은하수처럼 맑고”라는 비유는 이 시의 구조를 결정짓는 핵심 장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유사성이 아니라, 인식의 도약이다.
유리관 속 액체와 은하수는 물리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러나 시는 이 둘을 연결함으로써, 우리가 세계를 구분해 온 기준—과학과 우주, 실험과 자연—을 무력화한다. 이때 비유는 장식이 아니라 사유의 방법이 된다.
즉, 이 시에서 비유는 ‘닮음’이 아니라 ‘연결’이며, 그 연결은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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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중심에는 분명히 ‘시간’이라는 주제가 놓여 있다. “누군가의 시간을 / 조금 더 늘려 줄 수 있기에”라는 구절은 약학이라는 학문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약은 병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시간을 연장할 수는 있다.
그 시간은 단순한 물리적 연장이 아니라, 관계와 기억과 사랑이 이어질 수 있는 여지다.
이 시는 바로 그 ‘여지’를 지키는 일을 자신의 윤리로 삼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실험은 단순한 연구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향해 열려 있는 시간의 문을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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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로 갈수록 이 시는 점점 더 명료한 선언으로 수렴한다. “나는 오늘도 / 조용히 생명의 편에 선다”라는 문장은 이 작품의 윤리적 중심을 형성한다.
여기서 ‘조용히’라는 부사는 특히 중요하다.
그것은 과장된 영웅주의를 거부하고, 일상의 반복 속에서 지속되는 책임을 강조한다.
이 시는 거대한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자리에서, 그러나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태도를 선택한다.
그 태도야말로 이 시가 도달한 가장 깊은 차원의 숭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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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연에서 “어둠이 깊을수록 / 별은 더 또렷해지고”라는 구절은 이 시 전체를 다시 한번 뒤집는다. 어둠은 더 이상 부정적인 배경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빛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이때 별빛은 외부의 천체가 아니라, 화자의 눈 속에서 흔들리는 내면의 감각으로 전환된다.
즉, 이 시는 끝내 외부 세계를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세계를 받아들이는 인간 내부의 변화를 보여준다.
별빛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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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주 시인의 「현미경 아래 별빛」은 과학과 시가 만나는 지점을 단순한 융합의 차원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두 영역을 동시에 변형시키는 작업이다. 과학은 이 시 안에서 감각을 획득하고, 시는 과학을 통해 윤리적 구체성을 얻는다.
그 결과 이 작품은 관념적 서정에 머물지 않고, 실제 세계에 개입하는 언어로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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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고 난 뒤 남는 것은 하나의 질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무엇을 보려 하고 있는가. 이 시는 그 질문에 대해 직접 답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태도를 제시한다.
얼굴을 낮추고, 작아 보이는 것 앞에 오래 머물며, 그 안에서 빛을 발견하던 학자는 이제 현미경으로 보던 세계가 아닌
주기율표의 분자식을 시로 접목하는
시인의 시세계에 입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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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경 아래의 세계는 더 이상 미시가 아니다. 약학 전공의 삶에서
제2의 도약의 길 시안의 별빛의 세계로
전환하신 2026년 4월 남영주 선생님의 문학바탕 등단하심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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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현미경 아래 별빛"이 세계와 우주를 시로 유영하는 시인으로
제2의 분자, 원소, 또 분열되는 신비로운 남영주 시인의 시세계를 펼치시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