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
황혼
■
월훈 박은선
네가 꽃이었던 시절이 있었더냐
네게 꽃이 피던 계절이 있었더냐
우리가 꽃씨를 뿌리던 세월이 있었더냐
새파란 심장에 씨앗 한 움큼 던지고
연초록 바다로 피어나길 기다리던 손 모음
급기야 빨갛게 태양 닮은 꽃물이 번진다
수평선 너머 예견되는 사계절의 색색
그곳에 있는 새색시, 내 각시,
거기에 계시는 내님, 사모하는 내님
꽃물이 넘쳐난다
봄꽃이 피었다
■
황혼, 기억이 다시 피어나는 자리
■
박은선 시인의 시를 읽고 나면 어떤 장면 하나가 또렷이 남는다기보다, 먼저 어떤 기분이 오래 머문다. 말로 붙잡기 어려운데도 분명 한 번쯤 지나온 듯한 감각, 그것이 이 시의 첫인상이다. 연결되는 시인은 마르셀 프루스트다 「황혼」은 현재의 풍경을 또렷하게 묘사하기보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다시 불러오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이 시는 눈으로 읽는 작품이면서도, 동시에 마음속에서 늦게 되살아나는 기억의 촉감으로 남는다.
■
첫 연의 세 문장은 모두 질문형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단순한 회상의 말투가 아니다. 시인은 끝까지 “있었다”라고 단정하지 않고 “있었더냐”라고 묻는다. 이 한 어미가 만들어내는 정조는 매우 섬세하다. 그것은 기억을 손에 쥐듯 확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조금 떨어져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더듬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로 그 망설임이 기억을 더 깊게 만든다. 우리의 기억은 사실 그 자체보다 그때의 감정, 그때의 떨림, 그때의 온도로 남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첫 연의 물음은 상대를 향한 질문이 아니라, 오래전 자기 안에 묻혀 있던 시간을 스스로에게 천천히 되묻는 목소리라고 해야 한다.
■
이 시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꽃’이 아니라, 그 꽃의 이전 단계인 ‘씨앗’이다. “새파란 심장에 씨앗 한 움큼 던지고”라는 구절은 이 작품 전체를 떠받치는 핵심 이미지라 해도 좋다. 여기에는 사랑의 시작이 담겨 있다. 정리된 감정, 설명 가능한 감정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마음속으로 불쑥 날아드는 어떤 시작 말이다. 특히 ‘던지고’라는 동사는 의미심장하다. 사랑은 계획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닥쳐오는 것이며, 우리가 선택했다고 믿기 전에 이미 우리 안에 자리를 잡아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한 줄에는 설렘만이 아니라, 피할 수 없이 시작되어 버린 운명 같은 순간까지 함께 배어 있다.
■
이어지는 “연초록 바다로 피어나길 기다리던 손 모음”은 매우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언뜻 보면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사랑의 풍경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오래 머물러 읽어보면, 결국 이 ‘손 모음’은 한 사람의 손으로 수렴되는 듯한 쓸쓸함을 남긴다. 사랑은 둘이 시작할 수 있어도 기억은 늘 혼자 견디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것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비어 있는 자리를 남겨 둔다. 바로 그 침묵 때문에 독자는 자기의 시간을 이 시 속에 얹게 된다. 좋은 서정시는 설명보다 여백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하는데, 「황혼」은 그 점에서 조용히 깊은 힘을 발휘한다.
■
황혼의 이 작품을 더욱 인상 깊게 만드는 것은 색채의 이동이다. 시는 푸름에서 시작해 초록을 지나 마침내 붉음으로 번져 간다. 새파란 심장, 연초록 바다, 빨갛게 태양 닮은 꽃물. 이 변화는 단순한 자연의 색 변화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의 성장 과정이자 시간의 농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에 가깝다. 푸름은 시작의 미숙함과 맑음을 품고 있고, 초록은 생명이 무르익어가는 머무름의 시간이며, 붉음은 완성의 빛과 동시에 소멸의 예감을 함께 품은 상태다. 그래서 “빨갛게 태양 닮은 꽃물이 번진다”는 구절은 환희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가장 선명한 순간이 곧 가장 사라지기 쉬운 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 문장은 은근히 품고 있다. 아름다움은 절정에 이를 때 이미 이별의 그림자를 지니게 된다는 것, 바로 그 서늘한 진실이 여기 스며 있다.
■
셋째 연에 이르면 시는 한 번 더 깊어진다. “그곳에 있는 새색시, 내 각시, / 거기에 계시는 내님, 사모하는 내님.” 이 대목은 현대시의 언어라기보다 오래된 정서의 언어를 불러온다. 그래서 처음에는 조금 낯설게 들리지만, 실은 그 낯섦이야말로 이 시의 정감을 더욱 짙게 만든다. ‘내님’이라는 호칭에는 소유의 욕망보다 그리움의 품위가 있고, ‘사모하는’이라는 말에는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존재를 귀히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다. 특히 “계시는”이라는 표현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형의 사랑을 회상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곁에 없더라도 여전히 삶의 중심 어딘가에 살아 있는 존재를 불러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사랑은 지나간 사랑이면서도 동시에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이다.
■
예컨대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가가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다. 프루스트에게 기억은 과거의 박제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향기, 어떤 촉감, 어떤 사소한 계기를 통해 갑작스레 현재로 되살아나는 감각의 사건이었다. 잊었다고 생각한 시간이 어느 날 문득 되돌아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흔드는 것, 그것이 프루스트적 기억의 본질이다. 박은선 시인의 「황혼」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읽힌다. 여기서 꽃은 실제의 꽃이라기보다 되살아난 시간의 형상이다. 한때 지나가버렸다고 믿었던 사랑, 이미 끝났다고 여겼던 계절, 오래전 묻어 두었던 감정이 지금 다시 다른 빛깔로 피어나는 순간. 시는 바로 그 되살아남의 기적을 아주 조용한 언어로 보여준다.
■
마지막의 두 줄, “꽃물이 넘쳐난다 / 봄꽃이 피었다”는 더욱 인상적이다. 이 시는 제목이 「황혼」인데 끝은 ‘봄꽃’으로 닫힌다.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황혼은 저무는 시간의 상징이지만, 봄꽃은 시작과 생명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둘은 이 시 안에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완성한다. 저물어가는 시간 속에서도 다시 피어나는 것이 있고, 끝났다고 믿었던 것들 가운데서도 끝내 소멸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시는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결말은 단순한 반전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다. 사라진 것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옮겨 가며, 늦게 돌아오는 것들 또한 삶의 한 진실이라는 깨달음이다.
■
그래서 이 작품은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비애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시에는 상실의 정조가 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자리에는 조용한 확신이 놓여 있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은 헛되지 않았고, 그 안에서 피어났던 것들은 형태를 바꾸어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확신이다. 사랑은 끝나도 흔적은 남고, 계절은 지나도 기억은 다시 꽃이 된다. 이 시가 주는 감동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독자로 하여금 지나간 것들을 단지 잃어버린 것으로만 보지 않게 하고, 한 번 피었던 것들은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다시 피어날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
■
이 시를 덮고 나면 누구나 한 사람쯤 떠올리게 된다. 한때 꽃이었던 사람, 함께 씨앗을 뿌리던 시간, 그리고 지금은 곁에 없더라도 아직 마음속에 “계시는” 존재. 바로 그 순간, 「황혼」은 더 이상 남의 시가 아니다. 독자 각자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자기 자신의 시간이 된다. 좋은 시는 읽는 사람의 삶을 잠시라도 자기 언어로 비추어주는데, 박은선 시인의 「황혼」은 그러한 서정의 힘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지닌 작품이다. 황혼의 빛으로 시작해 봄꽃의 생명으로 끝나는 이 시는, 결국 기억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피어나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 남는다는 사실을 아름답게 증언하고 있다
시인의 믿음,
사랑의 감정이 느껴지는 빛으로 다시 피어날 황혼은 월훈의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