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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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꽃
— 박두익
밤하늘에 반짝이는 뭇별과 같이
골짜기에 별들이 총총
바람이 줄행랑을 치면
골짜기는 도라지꽃밭이 되네
돌틈에 이마를 대고 속삭이듯
고개를 갸우뚱 내밀다가
지나가는 바람결에 깜짝 놀라
안으로 재빠르게 도망을 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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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꽃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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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땅으로 내려오는 윤리
이 시는 첫 행에서 이미 세계의 질서를 바꿔 놓는다. 별은 원래 하늘의 것이다. 그러나 박두익 시인의 시에서는 그 별이 골짜기로 내려온다. 이것은 단순한 이미지의 전환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윤리적 선택이다. 높은 곳의 빛을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는 일, 그것은 곧 시인이 서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오히려 아래로 내려가 그곳에서 별을 발견한다. 이 시는 그렇게 ‘낮은 자리에서 발견한 우주’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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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행랑치는 바람 — 유머의 철학
“바람이 줄행랑을 친다”는 표현은 이 시 전체를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자연을 의인화하는 것은 흔하지만, 이처럼 생활어의 감각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드물다. 여기서 바람은 더 이상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 마치 사람처럼 도망치고, 장난치고, 상황을 흔들어 놓는다. 이때 시는 비로소 숨을 쉰다. 박두익의 풍자는 날카로운 비판이 아니라, 이렇게 슬쩍 비껴가는 웃음 속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공격이 아니라 드러냄이며, 조롱이 아니라 공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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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의 평등 — 존재의 민주성
골짜기는 낮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 낮은 곳이 오히려 별로 가득 찬다. 위계가 뒤집힌다. 높은 것이 낮은 것으로 내려오고, 낮은 것이 빛나는 중심이 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시인이 평생 견지해 온 시선의 방향을 보여준다. 그는 언제나 주변을, 변두리를, 돌틈과 같은 자리를 바라본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진짜 빛이 드러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시의 골짜기는 하나의 작은 세계이며, 그 안에서 모든 존재는 동등하게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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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틈에 이마를 대는 존재의 방식
돌틈에 이마를 댄다는 표현은 이 시의 가장 깊은 장면 중 하나다. 그것은 단순한 자세가 아니라, 삶의 태도다.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온 존재가 더 이상 큰 소리로 말하지 않고, 작은 틈에 기대어 숨을 고르는 순간. 그 고요 속에서 비로소 진짜 말이 태어난다. 박두익의 시는 바로 그 지점을 포착한다. 거대한 서사가 아니라, 작고 미세한 움직임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길어 올린다. 이 장면은 80년의 시간을 견뎌온 한 시인의 내면과도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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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 숨는 꽃 — 시대의 초상
도라지꽃은 바람이 스치면 놀라 숨는다. 이 장면은 너무도 인간적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세상의 기척에 놀라 스스로를 감추며 살아왔는가. 권력 앞에서, 폭력 앞에서, 혹은 단순한 눈빛 하나 앞에서도 우리는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시 들어간다. 박두익 시인은 그 모습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이때 풍자는 비로소 힘을 얻는다. 숨는 것을 비난하지 않고, 숨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그의 시가 가진 도덕적 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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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과 풍자의 이중 구조
이 시에는 두 개의 흐름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는 별과 꽃으로 이어지는 맑은 서정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과 몸짓에서 드러나는 소박한 풍자다. 이 두 흐름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섞이며 하나의 호흡을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기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삶을 통과한 시인만이 얻을 수 있는 균형이다. 울음과 웃음이 동시에 가능한 자리, 그것이 바로 박두익 시의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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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이라는 시간의 의미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나이를 잊는다. 여든이라는 숫자는 이 시 안에서 아무런 무게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더 어린 감각이 살아 있다. 별을 꽃으로 보고, 바람을 도망치는 존재로 상상하는 이 시선은 여전히 생생하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힘이다. 나이가 쌓일수록 감각이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지고 더 섬세해지는 것. 박두익 시인은 지금도 세계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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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골짜기 — 시의 현재성과 미래
이 시는 과거의 풍경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바람이 줄행랑을 치고, 도라지꽃이 놀라 숨고, 별이 골짜기로 내려오고 있다. 박두익의 시는 그 현재를 붙잡는다. 그래서 그의 시는 낡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 새로워진다. 오늘, 그의 여든 번째 생신을 맞아 우리는 한 사람의 나이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시의 시간을 축하한다.
박두익 시인의 시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더 깊어지고 있다.
골짜기는 앞으로도 계속 별로 채워질 것이며,
도라지꽃은 여전히 조용히 세상을 비추고 있을 것이다.
오늘 80회 생신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