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0원 아끼려다 안 사도 되는 책을 샀다
이게 다 내가 너무나 알뜰해서 일어난 일이다. 어제 아침 댓바람에 인터넷서점이 보낸 문자를 보았다. 내가 보유한 적립금 2860원이 곧 소멸한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전에도 받기는 받았다. 그때는 사고 싶은 책도, 읽어야 하는 책도 없는데 적립금 때문에 굳이 돈을 써야 하나 싶은 마음이 컸다. 막상 당일이 되고 ‘오늘 내로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한다’는 말을 들으니 2860원이 아까웠다. 100원도 아니고 1000원도 아니고 자그마치 2860원이다. 이 돈이면 붕어빵이 몇 개냐? 내가 이 돈을 모으기 위해 인터넷 서점에 얼마나 갖다 바쳤을까? 하루종일 땅만 보고 걸어도 줍기 힘든 2860원이다. 책을 사기로 했다.
“조금만 보태면 책을 한 권 살 수 있겠군.”
책을 사기로 마음은 먹었는데 구입해서 읽고 싶은 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핸드폰 앨범을 뒤져보았다. 나는 온라인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일단 화면저장을 해 둔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권도 없다. 흔한 일이어서 놀랄 일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 보이지 않으니 아쉽다. 하기사 지금 나에게는 읽을 책이 많이 있다. 내 책상 위에 도서관에서 빌려오기만 하고 표지도 넘기지 않은 책이 2권, 오래 읽어야 할 것 같아 구매했지만 아직 시작하지 않은 책이 1권, 읽다가 만 책이 침대 머리맡에 1권 등등이다.
2860원을 허공으로 날려 버리기 싫어 일단 인터넷 서점으로 갔다. 서점에서 책 구경하다 보면 뭐라도 있으리라. 인터넷 서점의 이 공간 저 공간을 헤매다가 발견했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노인들의 세상을 유쾌하게 담았다는 실버센류 모음집이다. ‘센류’는 일본 정형시의 하나인데 5-7-5의 총 17개 음으로 된 짧은 시라고 한다. ‘하이쿠’는 들어 봤는데 ‘센류’는 이번에 처음 본다. ‘하이쿠’는 주로 계절을 이야기하고 ‘센류’는 풍자와 익살을 이야기한다. 실버센류는 일본의 전국 유료실버타운협회 주최로 2001년부터 매해 열리는 센류공모전 이름이다. 이 책에는 11만 수가 넘는 센류 응모작 중에 선정된 88수를 담았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할멈 개한테 주는 사랑 나한테도 좀 주구려”
“일어나긴 했는데 잘 때까지 할 일이 없다.”
“연세가 많으셔서요. 그게 병명이냐. 시골의사여”
책 소개에 나오는 센류들이 재미있다. 노인들의 일상과 고충을 유쾌하게 표현하다. 궁상맞지 않고 안쓰럽지 않고 여유가 느껴진다. 몇몇 개가 이렇게 재미있는데 나머지는 얼마나 재미있을까.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을 구입했다. 책값 11970원에 택배비 2500원이다. 2860원을 날리지 않아 그런가 돈을 번 기분이 들었다.
오늘 책을 받았다. 글자 크기가 너무 커서 놀랬다. 다 읽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재미는 있는데 굳이 구매할 필요까지 있었나 싶다. 공감 가는 내용이 많지만 그렇지 못한 센류도 꽤 보인다. 아직 내가 노인이 아니라서 그런 거리라. 분명하다고 힘주어 말해 본다. 하하하. 가끔 꺼내 읽을까? 재미있지만 아닐 것 같다. 아, 괜히 샀다. 2860원 아껴보겠다고 안 써도 되는 11610원을 쓰다니,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