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
너무너무 재미있다.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는 웨이브 (OTT 서비스 플랫폼 )에서 제작한 예능 프로그램이다. 일단 봐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보시라.
나름 취향이라는 것이 있는데 아무 정보도 없이 무조건은 못 보겠다는 사람들을 위해 제작사의 말을 빌려 간단하게 소개해보겠다. 프로그램 제목에서 ‘사상’은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에서 개개인의 가치관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13명의 참가자들이 9일간 함께 지내며 다양한 활동을 통해 획득한 상금을 적립한다. 자신의 사상 점수를 들키거나( 남이 나의 사상 점수를 검증해서 맞혔다는 의미이다.) 각종 활동에서 탈락자로 선정되면 탈락한다. 끝까지 탈락하지 않고 살아남은 참가자들은 자신이 적립한 상금을 가져갈 수 있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키지 않는다고?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무슨 사상? 웬 사상 검증? 사상 검증 구역은 뭐야? 온갖 서바이벌 예능이 난무하더니 이제는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에 사상 점수라는 이름을 붙이고 예능의 소재로 삼은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런데 보기를 참 잘했다. 참가자들의 사상 점수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일 뿐이다. 좌파와 우파, 페미니스트와 그렇지 않은 사람, 부자와 서민, 진보와 보수 -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어떤 것을 보여줄지 궁금하지 않나? 궁금할 텐데?
아주 조금 궁금하지만 서바이벌 예능에 질렸다고? 그렇다면 더더구나 꼭 봐야 한다.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는 다르다. 남을 탈락시켜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내 생존을 위해서 무한한 이기심을 드러낼 수 밖 수 없는 기존 서바이벌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서바이벌 예능에 참여한 경험이 많은 마이클이라는 참가자가 있다. 그가 기존 서바이벌 문법이 어쩌니 저쩌니, 생존하려면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헛발질이다. 참가자들은 아무도 탈락하지 않고 모두가 끝까지 살아남는 것을 꿈꾼다. 그리고 협력하고 노력한다. 상대를 탈락시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서바이벌을 본 적이 있는가? <사상검증구역:더커뮤니티>가 그렇다. 유일무이한 서바이벌인데 봐야 한다.
탈락과 생존이 주는 쫄깃한 맛이 없으면 재미없다고? 네버 절대 그렇지 않다. 잘 들어봐 봐. 참가자들이 하루종일 무엇을 할까? 낮에는 상금을 획득하기 위해 수익활동을 한다. 수익활동에서 상금을 벌어야 밥을 먹을 수 있고 개인 자금으로 적립이 가능하다. 밤에는 예민한 주제를 두고 익명채팅창에서 토론을 한다. 토론이 뭔가? 말로 하는 싸움이다. 싸움 구경이 재미없을 리가 없잖은가.
토론 주제는 ’ 데이트 비용을 더 내는 남자가 섹시한 것은 자연스럽다.’ ‘빈곤의 가장 큰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 국가발전에는 유능한 독재자가 필요한 시기가 있다.’ 등등이다. 참가자들의 토론이 썩 훌륭하지 않다. 토론의 본질에 들어가지 못하고 단어의 의미에 집착하거나, 자신의 주장만 주야장천 늘어놓거나, 가끔은 토론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런데 의외로 흥미진진했다. 고품질도 아니고 난장판도 아닌 그런 토론인데도 재미있더라. 사상이 완전히 다른 그들이 싸우지 않고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비록 방송 촬영 중이어서 그랬을지도? ) 대화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랬나? 아마도 그런 것 같다.
특정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것 외에도 참가자들은 끊임없이 의견을 나누고 규칙을 정하고 합의한다. 이것은 바로 국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 아니던가? 식사메뉴, 공금 징수 방법 빛 비율, 공금 사용규칙, 리더 투표, 수익활동 상금 분배, 이주민 대책 등등 커뮤니티 운영에 필요한 것을 논의한다. 마침내 모두가 탈락하지 않고 다 함께 살아남는 커뮤니티를 만들기로 합의한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슬프게도 그랬다. 배신자가 생기고 활동을 할 때마다 최소 1명은 탈락시키겠다는 제작진의 술수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모두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공동체는 프로그램에서도 현실에서도 불가능한 꿈인가? 제작진의 술수로 참가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탈락자가 한 두 명씩 발생하게 된다. 탈락면제권을 획득한 사람은 몇 명 없었다. 처음에는 선의의 탈락면제권을 써서 구제했지만 개인의 탈락면제권을 남을 위해 사용하라고 계속 강요할 수 없었다. 다 함께 살아남는 커뮤니티가 가능하다고 누구보다 더 강하게 믿었던 하마와 테드가 탈락해서 많이 속상했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종신리더였던 백곰이 이때 제작진에게 거래를 제안했으면 어땠을까? 공금으로 탈락면제권을 구입한다던가. 탈락자를 구제하는 대신 상금이 없는 활동을 한다던가. 백곰은 누구보다도 구성원들의 안전에 진심이었는데 아쉬웠다. 뭐라도 해 볼 수는 없었나. 커뮤니티 밖으로 나가야 하는 탈락자가 마치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 소외당하는 장애인, 무시당하는 약자와 겹쳐 보였다면 지나친 비약인가.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낭자와 다크나이트는 모두가 행복하고 안전한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한다. 정말 그럴까. 하마가 꿈꾸던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도 너무 불행하지 않는, 너무 그 세상이 두렵지 않은 세상‘은 그저 이상일까.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 나는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서바이벌 예능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할 줄이야. 정말이지 너무너무 좋은 프로그램이다. 꼭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