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엔데의 <모모>를 읽고
오랜만에 모모를 만났다. 철부지 모모 말고 한 번도 빗질을 한 적이 없는 듯 마구 뒤엉켜 있는 머리카락에 짝짝이 신발을 신고 낡아빠진 헐렁한 남자 웃옷을 입고 눈을 반짝이던 소녀 모모말이다. 시간 도둑들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 준 모모를 만난 것은 20여 년 전 만남이 처음이고 이번이 두 번째이다. 미하일 엔데 작가의 <모모>를 20여 년 만에 다시 읽는다. 흠… 이게 뭐지. 지금은 그때 그 느낌과 사뭇 다르다.
읽는 시기에 따라 같은 책이라도 느낌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그렇게나 많이 다르나? 가장 큰 차이점은 시간이다. 20여 년 전 나는 엄청 바빴다. 어린아이들을 돌보며 시간을 쪼개며 살았던 것 같다. 지금은 가진 것이 시간뿐이다. 넉넉하다. 하루 종일 멍 때려도 상관없을 정도로 시간이 많다.
처음 <모모>의 만났을 때 감명받았다. 모모와 모모 주변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아도 평안하고 화목하고 즐겁게 살아간다. 그랬던 사람들을 회색 신사들이 미래를 위해 시간을 아껴 저축하라고 꼬드긴다. 회색신사는 사람들의 시간을 훔쳐야 생명이 유지되는 족속이다. 미래에 여유롭게 살려면 시간을 저축해야 한다는데 사람들이 안 넘어갈 재간이 없다. 흘러가는 성질을 가진 시간이 저축한다고 남아있을 리 만무한데 사람들은 시간 도둑들의 말을 믿고 시간을 아껴 저축하려고 애쓰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문제는 그들이 불필요하다고 여겨서 아끼는 시간의 내용이다. 나이 드신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을 필요 없다고 줄인다. 손님 한 명에게 들이는 정성을 줄여 시간을 아낀다. 사랑하는 연인의 집을 방문하는 시간도 아까워 횟수를 줄이다가 결국은 헤어진다. 시간을 아끼려고 그들은 바쁘고 바쁘고 바쁘다. 그들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럴 수가. 다른 것은 몰라도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을 놓치는 바보는 되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바보처럼 산 대가로 부와 편안한 삶을 성취한들 행복하랴. 모모 덕분이다.
20여 년이 지나 지금이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다. 그동안 회사를 그만뒀고 아이들은 컸고 집안일이 많이 줄었다. 오늘 당장 무조건 해야 할 일도 잘 생기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연의 변화를 느끼며 매사에 감사하며 느릿느릿 살고 있다. 큰소리로 말하기는 조금 민망해서 작은 소리로 말해 본다. “나는 모모처럼 살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20여 년 전에 크게 감명받았던 <모모>가 심드렁하다. 회색신사들이 사람들을 꼬드기면서 하는 말이 비과학적이고 논리가 없는데 사람들이 쉽게 속는 게 말이 되냐는 등, 회색 신사들은 왜 모두 대머리일까 등. 회색 신사들은 시간을 살 생각은 않고 훔치기만 할까 등, 모모가 시간도둑에게 시간을 찾아오는 방법과 여정이 설득력이 약하다는 등, 동화는 동화라서 그렇구나 등등 괜히 트집이다. 나 왜 이래? 너무 나이 들었나? 그런가 보다.
회색 신사를 만나 작품 속 사람들처럼 속지 않고 나에게 유리하고 좋은 조건으로 시간을 팔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회색신사들은 살 것도 같은데? 아닌가. 내가 시간은 많고 돈은 적어 별 생각을 다한다. 하하하.